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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아닌 단상

손유미
2020년 04월 29일



 
비밀
아닌
단상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해볼까. 
요사이의 일들에 대해서. 
 
며칠 전에는 아이들이 반소매를 입고 축구하는 걸 보았다. 날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초봄에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데, 춥지는 않고 문득문득 무언가 벅차다는 듯이 공을 뻥 차고 숨을 몰아쉰다. 건강이 추위를 물리나.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실제로 그러진 않았겠지. 종종걸음으로 바람을 피해 실내로 들어가며 저들 중에도 더운 날에 카디건을 챙기는 어른이 나오려나.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관절을 얼마나 더 써야 하나 가늠하는 어른이. 나오겠지. 생각했다.
 
바람, 하니까. 추위, 하니까. 
지난겨울 가장 추위를 많이 탔던 때에 대해 말해볼까.
 
마침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이니까 여행 얘기도 할 겸. 1월엔 제주도를 다녀왔다. 친구들과 서른이 됐다고 해외를 갈까? 그럴까? 하다가 외국에서 들어온 친구가 있어서 비행기를 타는 국내를 가자고, 제주도를 갔다. 그 무렵 제주는 이례적인 더위로 사람들이 반소매를 입은 채 유채꽃밭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는데, 그걸 보며 우리는 외투를 새로 사긴 해야 할 것 같다고, 지금 가진 것보다 조금 더 얇고 활동적인 외투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너무 추웠다. 추위를 정말 안 타는 친구도 너무 춥다고 말할 정도로 추웠고, 즐거웠다. 고사리해장국 제일 맛있고 제철 방어 최고 맛있고 빨간 양념을 한 갈치조림을 먹었다니까 그냥 통갈치구이를 먹었어야지, 그런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난 맛있었는걸, 세상 맛있게 먹었다니까! 하는 그런 여행이 됐다.
 
어느날엔 세화해변을 걷다가 책방을 찾기도 했다. 책방에서 내 친구는 아이에게 줄 책을 고르고 나도 뭔가 기념이 될 만한 걸 골랐다. 친구는 혼자 오래 외출한 후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아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고 했다. 보통은 한주먹 안에 들어오는 플라스틱 조립 로봇같이 작은 걸 준비하지만 제주 여행은 삼박사일이니까, 조금 더 큰 걸 찾다가 책을,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를 산 것이다. 그리고 계산을 할 때 책방 주인과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선물하실 건가요? 포장해드릴까요?
─네.
─근데 이 책은 선물받는 분이 읽어보셨을 거예요. 워낙 유명해서. 한번 연락해보는 건 어때요?
─아니에요. 그 친구 이거 안 읽었어요. 제가 안 읽어줬거든요.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책방 주인과 친구의 대화를 듣고 친구의 선물을 받게 될 그 친구를, 친구의 아이를 생각하기도 하면서 나도 이 즐거운 순간을 기념할 만한 것을 찾았다. 아주 작은 감귤 키링을. 작고 귀여운 감귤. 기껏 가방이나 에어팟 케이스에 달아도 아무도 모를 감귤. 그러다가 누군가 발견하고 이거 귀엽다고 말한들 사실 아무 의미는 없는 감귤. 나의 작은 비밀 감귤. 하지만
 
사실 내가 갖고 싶은 건 크고 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대퇴근 같은 거?
 
여행을 다녀오고 며칠 안 돼서 친구네에 모두 모였다. 뭔가 아쉬웠던 것 같다. 손이 크고 솜씨가 좋은 친구의 음식을 먹으며 그 근처에서 잘하는 배달음식 얘기를 하다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했는데 소리를 몹시 키워도 노랫소리가 아주 희미하게밖에 들리지 않아서, 이게 무슨 일이람! 했는데, 알고 보니 위층 집 블루투스 스피커와 연결한 거여서 친구들과 한바탕 웃곤…… 침착하게 친구의 아이와 퍼즐을 맞췄다. 아이는 동그랗고 따듯한 머리를 숙여 맑게 집중하는데 아이들 퍼즐이 너무 어렵다, 카봇에 더이상 새로운 캐릭터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이런 말을 친구와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이는 카봇의 이름을 다 외우고 물론 공룡의 이름도 다 외우고 또 욀 걸 찾아내며 자라겠지. 퍼즐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내 손을 끌어다 맞추는 아이에게 친구는 여행을 다녀온 삼박사일의 외출을 뭐라고 설명했을까. 설명을 계속한 끝에 아이가 친구의 외출을 이해하기보다 잊어버렸다면…… 이 외출은 친구의 비밀이 된 걸까, 아이의 비밀이 된 걸까. 누구의 비밀이라도 되려나. 된다면 나도 약간 낄 수 있나, 비밀에 속해본 게 너무 오래됐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퍼즐을 맞추다가 꼭 조각 하나가 비어서 거기 있던 모든 친구들이 엉덩이를 들고 자리를 정리해도……
 
그런데 그 모든 장면이 오래된 비밀 같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하며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오래된 비밀. 
오래 둬서 자리가 약간 빈 비밀. 
아귀가 맞지 않는 비밀. 부실해진 비밀.
 
사랑이나 사랑보다 더한 우정의 확인 과정에서 큰 맘 먹고 에둘러 빙빙 돌아 여러 소식들을 묻고 물은 끝에 드디어 비밀을 말할 타이밍에 말하고 말하고 말하다가 나조차 응? 이 부분 응? 왜 그렇게 됐지? 한다. 오래된 비밀이 유효기간을 다했다고 나도 모르게 사라져선 이젠 정말 완벽한 비밀을 이룬 것인데 그럼 문제는…… 지금 비밀을 말하는 중인 나. 이왕 말을 꺼내기 시작한 비밀이니까 끝은 내야겠는데, 이렇게 부실한 이야기로 내 비밀을 끝낼 수가 없어서 속으로 당황하다 당황하다 당황하다가 그 자리를 약간의 거짓으로 메꾸면. 이건 새로운 비밀의 탄생인데.
 
근데 너 엄청 졸았다. 내가 그때 무얼 말하고 있었는지는 까먹었는데, 그때 그 중요한 순간에 네가 졸다 졸다 잠든 건 기억난다니까,라고 말했다. 기억나네, 마네 친구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그 근처에서 잘한다는 배달음식을 먹으면서. 
 
그리고 이 모든 단상 끝에 남는 건. 이만큼의. 
 

 


손유미
2014년 창비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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