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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의 가계(家系)

강지혜
2020년 05월 20일



 
꽃나무의 가계(家系)


 
자정이 넘은 시각, 한통의 전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나 좀 살려줘. 내가 방금 뭘 치었는데. 차가 완전히 찌그러졌어. 나 여기 어딘지도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발 나 좀 살려줘. 
 
아기를 안은 여자, 어둠 속에서 사건 현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잠든 아기를 쓰다듬으며, 낮고 침착한 목소리) ……당신이 한 짓을 봐. 똑똑히 봐둬. 그리고 기억해. 이 모든 순간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해.
 
남자가 눈을 뜬다. 모든 게 꿈이었던 걸까. 스스로의 구취가 역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찾아온 극심한 갈증. 갈증. 갈증. 집안 어디에도 아내가 없다. 아이도 없다. 정신을 차리자. 여기는 어디지? 여기가 내 집인가? 나는 어디에 있었지? 이곳은 왜 익숙하지? 이때, 남자에게 달려드는 어둠. 맹수처럼 
 
인적이 드문 시골길. 여자가 구덩이를 파고 있다. 여자의 옆에는 작고 명랑한 아이. 엄마, 이거 뭐지? 엄마, 이거 나무. 나무, 안녕? 이거 꽃이네. 꽃. 안녕? 
 
여자와 아이 곁으로 벚꽃 잎, 수척하고 아름답게 낙하
여자와 아이 곁으로 시간이 온화하고 날카롭게 흐른다 
여자와 아이는 여자와 여자가 되고 
  
벚꽃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선 길에 서서 
한 나무를 바라보는 여자와 여자 
 
엄마,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지?
비밀 아니야. 어차피 누구도 안 믿을 거야. 아빠를 심어 벚나무를 살렸다는 말을 누가 믿어? 언제든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해도 좋아. 
   
여자가 된 아이의 얼굴 
꽃나무를 닮았다 
 

 


강지혜
2013년 『세계의 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가 훔친 기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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