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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와 할망당

이원
2020년 06월 10일



 
호크니와 할망당

 
올해 초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처음 가보았다. 사진으로 알고 있는 예전 자리의 휘트니도 좋았지만 하이라인의 남쪽 끝 지점, 허드슨 강변으로 옮긴 휘트니도 좋았다. 위층부터 천천히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앞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호크니였다. 옷차림도 호크니였다. 시간에 따라 좋아하는 미술 작품들도 달라지는데, 십여년 전부터 나는 데이비드 호크니를 참 좋아하고 있다.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좋아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치밀한 이론가이기도 한 그는, 고향인 요크셔로 내려가 풍경 앞에 이젤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대작에 속하는 이 그림들에는 빛과 색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매우 정통한 방식의 그리기와 아이패드 드로잉을 동시에 시도하는 능동성이 호크니를 여전히 현재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호크니가 휘트니에 자주 온다는 글을 읽기도 했다. 책에서 영화에서 접해왔던 호크니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는 분명 호크니였다.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러나 놓치지 않을 거리에서 호크니를 따라 작품을 보기 시작했다. 호크니일 가능성과 호크니가 아닐 가능성. 당신 호크니 맞아요? 나는 당신의 작품을 좋아해요, 이런 문장을 만들어보면서 말이다. 호크니는 남자와 동행하여 다닌다고 읽었다. 호크니인 것 같은 호크니 옆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호크니가 멈추면 호크니와 약간 비켜선 곳에서 나도 그 작품을 유심히 보았다. 호크니가 동행한 젊은 남자에게 손가락으로 작품 어딘가를 가리키면 나는 그곳에 담긴 무엇을 알아차리려고 애썼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의 앞모습을 호크니로 확신했다. 뒷모습이 호크니였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가 뒤돌았고, 뒷모습에서 미처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나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쳤으므로 일단 걸어야 했다. 안 그러면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 더 명확해지니까 말이다. 그와 나는 낯선 춤을 추는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도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분명 앞모습도 호크니였는데, 말을 걸지 못한 것은 화면이나 사진을 통해 본 것보다 그가 젊었기 때문이다. 그와 나의 대면은 이렇게 짧은 순간으로 지나갔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몇초의 순간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의 뒷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호크니는, 묻지 않은 호크니에게서 더 선명해진다.  
  
호크니는 1983년 가을 6주간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첫 일과로 자화상을 그리기로 결정했고 그답게 열정적으로 실행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 자화상들은 내게 상당히 많은 것을 드러냈습니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자의식을 내려놓고 감정적으로 무방비상태의 연약한 모습을 드러낸 자화상이 좋다”는 마르코 리빙스턴의 관점도 있지만, 호크니가 만난, 호크니도 모르는 호크니는, 호크니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작년 여름 제주의 모슬포항에서 배 타고 10분 남짓 들어가야 하는 섬, 가파도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섬에 있어본 것은 처음이어서 설렘과 긴장이 비슷한 크기로 출렁거렸다. 바다를 따라 동그랗게 해안도로가 나 있었다. 내가 머물던 곳에서 나오면 동네로 가는 길과 무덤으로 가는 길로 갈라졌고, 나는 주로 무덤 쪽으로 걸었다. 저물녘에는 더 그랬다. 저물녘은 사람의 시간을 벗어나는 묘함을 갖고 있다. 낮이나 아침에 걸으면 낮은 묘들은 그냥 풀 속처럼 보인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풀 속에서 무덤의 모양이 나타나며, 어둑해지면 무덤의 모양이 선명하게 보이고, 밤중이면 어둠에 겹친 채 보이지 않은 무덤까지 느껴진다.
  
섬에 머물면서 바다의 여러색과 바람의 겹겹을 만났다. 오후 4시가 넘으면 섬에 있는 몇개의 식당도 문을 닫고, 6시 무렵 해녀 할머니들이 비슷한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적막과 고요의 층층도 보았다. 어둠과 석양이 불처럼 번지는 하늘을 만나기도 했다. 섬에는 ‘할망당’들도 있었다. 내가 있던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편편한 돌 제단이 놓인 곳이었다. 나는 산책을 할 때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기도를 할 줄 몰라 그냥 서 있었다. 선착장과 가까운 곳에는 훨씬 큰 할망당이 있었다. 
  
바위 속 할망당을 알게 된 것은 섬에서 떠나기 얼마 전이다. 등대 뒤편 바위가 가득한 곳으로 울퉁불퉁 걸어가보았는데, 바위 속에 있었다. 손으로 두뼘 정도 될 만한 낮은 높이에, 흰 천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작은 인형이 둘 걸려 있고 사람을 닮지 않은 둘둘 말린 흰 천이 하나 걸려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곳은 보이지 않고, 이곳에 오면 눈코입도 없는, 할머니로도 애기로도 느껴지는 그것들이 있었다. 오로지 흴 뿐인 모형에 대고,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기도의 마음이 생겼다. 기도를 할 줄 몰라 몇번이고 두 손만 가만히 맞대고 있다 나왔다. 
  
기도를 할 줄은 모르지만, 기도의 자세를 갖게 하는 장소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기도를 배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이라는 말이 간절할 때, 바위가 비워둔 그 낮고 작은 할망당이 떠오른다. 어쩌면 울퉁불퉁 걸어가 그 앞에 있어보는지도 모르겠다. 들어가면 안 보이는, 나는 그것과 대면하는. 지워져 있어도 지워진 곳에서 지워진 것들을 만나는. 
  
본다는 것. 대면한다는 것. 지워진 곳에서 지워진 것을 알게 된다는 것. 할망당의 천 인형이 떠오를 때. 호크니의 앞모습이 아닌 호크니의 뒷모습이 떠오를 때. 묻지 않아도 아는 것. 호크니는 “층은 제거될 수 있다”고 했지만, 말하지 않는 내 말을 듣는 귀가 있다는 것. 내 얘기를 듣는 그 귀를 생각한다. 
 
  


이원
1992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나는 나의 다정한 얼룩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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