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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민율

서요나
2020년 06월 11일
 
 

물과 민율
 
 
비자나무 기타를 멘 채 우리 둘은
물밑에 가라앉은 아케이드를 감상하고 있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아케이드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것을 물이라고 
대신 불러야 할 것 같았네
 
수면 위로는 쓰레기들이 부유하는 중이었고
쓰레기들의 흔들림을 따라 우리는 숨을 쉬었고
귀를 막고 숨소리를 물에게 빌려주면
물의 숨소리가
숨소리가
 
멀었다가 회복되어 돌아오는 시력처럼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되돌아왔다
튕기지 않아도 기타는 
연주되는 중이다
 
시력을 버리고 싶어지는 정오다
 
시력이라는 밀물은 얼마나 끔찍한지
천발의 폭죽들을 쏘아올리고 그 가운데 누워서
구구절절 명료하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민율 너는 기타 목을 벤 채 묻고 있었지
 
지난밤의 암흑 속에서
암흑 속의 눈부신 채팅창에서 누군가 그랬다
 
이 빌어먹을 기타 좀 이제 버리러 가자고
그게 그런데 누구였더라
귀신의 맥박 소리처럼 기억에 없다
 
민율아, 공시 시험장에서 첫눈에 반해버린 갈색 머리 언니가 
 
사실은 너와 난 계속 같은 시험장이었어
옛날엔 네가 스물하나였니? 나한테 반하기 전까지
넌 날 못 봤겠지만
네가 나를 보기 전에 내가 더 먼저 너한테 반했다는 거
넌 모르지
그런데 이 마음을 열면 
폭탄일지 폭죽일지 나도 알지 못해
 
하고 속삭여주던 그 말을 듣고 헐레벌떡
뒷걸음치고 또 치다가 그 핑계로
공시 깨끗하게 포기해버리고 온 내 사랑하는 스물여섯 친구 민율아
 
암흑 속의 채팅창에서 지난밤 누군가 그랬다
 
이 징그러운 기타 좀 이제 버리러 가자고
근데 대체 그게 누구였냐고
 
작업표시줄이 수챗구멍처럼 채팅창을 빨아들이고
시험 응시 취소 화면이 눈꺼풀 안처럼 검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또 빛났지
 
하얀 컴퓨터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오년 동안 찢어져온 마음을 곤충의 온기로 복습하는 동안
get rid of that nasty and annoying guitar
nasty and annoying
nasty
인간의 냉기로 태어나며 외면되는 하룻밤 치의 대화를
내 기억까지 동반으로 점차 점차 잊어주다니
너는 마치 하느님과 짐승의 혼종인 것처럼 
내게 언제나 사랑스러웠구나
 
수몰된 아케이드를 감상했네
물속의 아케이드를
 
아케이드가 너무 아름다워서
물처럼 빠져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지
 
물이 우리에게 시력을 되돌려주고
팔다리를 되돌려주었지만
 
민율과 나는 아직도 기억을 못해
누가 기타를 버리러 가자고 했는지
 
그래
마치 우린 전염병에 감염된 것 같아
천사로부터
 
미래를 잠깐만 떠올려도 현기증이 피어나는 것 같은데
과거를 거꾸로 되짚으면 왜
조금도 피곤하지 않을까
 
이런 건 어때?
스물여섯에서
스물일곱으로의 환생
스물일곱에서
스물여덟으로
환생
 
그러나 숨소리처럼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는 게
정교한 흉기처럼 너를 이해하게 만든다
 
고장 난 오르골 위의 발레리나 같은 포즈로
아케이드를 향해 뛰어들 준비를 하는
너를
 
공시생 민율아
이 이름이 이제 너무 싫겠지만
 
홈페이지 화면도 변해가고
시험장의 계절도 변해가고
 
빛에도 역사가 있고
역사가 지워진 빛은 
세상이 되고
 
우리 다시 돌아가면
아직도 불 꺼진 방 안의 컴퓨터 주위를 
돌고 있을 거니?
 
너는 자라네
빛으로 크고
어둠으로 살찌고
 
꽃들은 자살하고
 
너는 자라네
빛으로 어둠으로 너는 자라고
나 홀로 여기에서 
여기에서 나 홀로 춤추고 있네
나 혼자 남아
밀려드는 시력으로
홀로 여기에서 춤추네
 
  


서요나
2018년 『페이퍼이듬』에 작품 「낯」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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