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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하나 생명 둘 생명 셋

성다영
2020년 06월 11일
 



생명 하나 생명 둘 생명 셋


나는 동물과 함께 잠들고 다시 잠에서 깬다.

현재 나는 강아지 하나, 동거인 둘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누구와 어디에서 먹고 자는지는 내가 쓰는 시나 산문으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가끔은 내 삶의 형태가 간단하게 이름 붙여진다. 누군가는, 아! 그러니까 자취하시는군요,라고 말한다. 양친과 같이 살거나 결혼하거나, 이 두 경우가 아닌 삶의 형태에 관하여 말할 때, 대부분 자취한다고 표현한다.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취를 진짜 삶으로 가기 전 단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내 삶은 다음으로 가기 위한 임시적 삶이 아니다. ‘자취하다’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하다’라는 의미인데, 한국어 표현에서 밥은 단순히 밥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밥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다운 모습을 그럭저럭 갖추며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오디를 만나기 전에 그다지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며 살지 못했다. 나는 내 몸 하나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벌지 못했으며, 시를 쓴다는 이유로 학교도 중퇴한 상태였으므로 학생도 아니었다. 양친이 주는 용돈으로 생활했고 용돈은 부족했지만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묻다가 해가 저무는 날도 있었다.

유기견이었던 오디가 내가 사는 집에 오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드디어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유기견을 입양한 나에게 생명 하나를 살렸다며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생명 하나를 살린 것은 오디였다. 오디와 함께 살면서, 동물이 지닌 생명의 가치보다 인간의 것이 더 크다는 말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하물며 그러한 동물을 어떻게 식품으로 생각하며 먹을 수 있겠는가.

물론 나도 오디와 함께 살게 되자마자 비거니즘을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오디와 함께 살면서도 나는 육식을 했다. 처음에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평소에 퀴어와 페미니즘 이론에 관심이 많던 나는 우연히 캐럴 제이 애덤스(Carol J. Adams)의 『육식의 성정치』1)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서문을 읽던 중에 나는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다. 동물이 겪는 폭력의 일부가 몸으로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부였지만 나를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이후 나는 비건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순히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것을 넘어 무엇을 더 실천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았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

개들에게 감정이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돼지는 어떻지? 돼지도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 (…)
돼지도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2)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오랜 시간 이어져온 가부장제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의 발명이 가부장제에 대한 반성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비거니즘도 육식주의를 지시할 수 있게 되면서 탄생했다(물론 오래전부터 채식주의자라는 개념은 존재했지만, 현재 비거니즘의 의미와 차이가 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성기 외형으로 판단당하여 여자로 규정된 후, 남성과는 늘 구분되어 취급되었다. 그리고 동물을 먹었다. 이 모든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비거니즘은 ‘자연스럽게’ 깨달아지지 않는다. (이 글이 당신에게 사건이 되기를 바라본다.)

나는 가부장제에서 내가 당하는 취급이 동물이 당하는 취급과 다르지 않음을 몸으로 느꼈다.3)

나는 매일 아침, 살아서 움직이는 동물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강아지는 인간과 닮았지만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나는 오디의 특징과 습관을 파악하기 위해 하루에 몇시간씩 공부했다. 나는 오디의 존재가 신기해서(입양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신기하다) 오디에게 말을 건다. 오디야 오디는 동물이지? 동물 오디야.

내가 아직 육식을 하고 있을 때,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가끔 가금류의 뼈를 바닥에 떨어뜨리곤 했다. 오디는 곧바로 냄새를 맡고 달려왔고, 나는 안 돼!라고 크게 말했다. 오디는 안 돼,라는 말을 알아들어서 멈출 때도 있었지만, 이미 뼈를 입에 넣었을 땐 오디의 입을 벌려 손으로 빼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입에서 동물을 빼내야 하는 것은 나였다. 강아지는 잡식동물이라서 익히지 않은 뼈를 씹어 먹기도 하고, 피비린내가 나는 날고기도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인간은 채식동물이다. 당신이 정말로 육식주의자라면 피가 흐르는 싱싱한 동물을, 물속에서 바로 꺼낸 생물을 곧바로 뜯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는 여러분이 지금이라도 육식을 하는 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오디와 공원에 산책을 가면, 핸드폰 전면 카메라로 강아지와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자신의 개를 사랑하고 가족처럼 대하지만 동물을 먹는다. 왜 개나 고양이를 귀여워하고 사랑하면서 다른 동물을 먹을까? 상어의 지느러미를 얻기 위해 그것만을 잘라서 취하고 몸통은 다시 바다에 버리는 행위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당신은 왜 연어를 먹을까?

돼지들이 피 냄새를 맡으면 앞으로 가려 들지 않지요. 어느날 밤에는 몰이꾼이 화가 난 나머지 판자 조각으로 돼지의 등을 내리쳐서 부러뜨리더군요. 돼지를 움직이게 하려고 몰이에 쓰는 봉을 항문에 쑤셔넣는 걸 본 적도 있어요.4)

나는 까페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까페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니 양해해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사람들은 페트병에 들어 있는 물을 마시고 플라스틱 컵이나 종이컵으로 커피를 마시며, 플라스틱 포크로 디저트를 먹는다. 주문하는 사람들에게 까페 직원이 묻는다. 일회용 잔만 가능한데 괜찮으세요?

세상에는 한번만 쓰는 물건이 왜 이렇게나 많을까.

규모가 큰 까페에서 하루에 나오는 일회용품 쓰레기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까페 사장은 손님 중 누군가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서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일단은 우려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인재이다. 엄청난 수의 동물을 가두기 위해 또는 기타 등등의 인간 필요에 의해 야생동물 서식지를 인간이 (이미 침범했지만, 계속해서) 침범하면서, 또 각종 동물을 밀집사육하면서 이 인재는 예고되었다. 사람들의 사고는 아주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지금만 아니면 되고, 여기만 아니면 되고, 내 가족이나 나만 아니면 된다. 

뉴욕 브루클린의 작은 만, 데드호스만(Dead Horse Bay)은 19세기에 말의 뼈나 유리병을 버리는 곳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폐기물은 바다에 버린다. 바다가 충분히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바다에는 인간이 살지 않기 때문일까.

실상은 재생이 가능하더라도 그냥 버린다. 그것을 버리는 비용이 처리하는 비용보다 싸기 때문이다. 거대한 플랜트를 여러개 가진 자본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캡모자가 더러워지거나 망가졌을 때 그것을 수선하거나 세탁하는 비용은 새 물건을 사는 것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겨워지거나 요즘 트렌드가 아니라서 등등의 이유로 새 물건을 산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고, 그것을 구매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생기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거리엔 사람이 줄어들었고 음식점도 까페도 한가하다. 나의 가족 중 한명은 주오일 근무를 하던 중, 코로나19로 인해 매출액이 줄어들자 주이일 근무로 전환되었다. 소비활동이 심하게 위축되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전지구의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과연 그럴까.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이 통제된 (…) 인도 동부 오디샤주 간잠지역 루시쿨야 해변에서 최근 5일 동안 올리브바다거북 80만마리(8 lakh・랙) 이상이 목격됐다. (…)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사람들의 잦은 해변 출입과 쓰레기 등으로 인해 바다거북들이 둥지를 틀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 2002년, 2007년, 2016년에도 바다거북들은 이 해변에 알을 낳으러 오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5)

당신이 매일 먹는 음식은 어디에서 올까? 당신이 동물을 먹는 사람이라면 목장을 떠올릴 것이다. 햇살에 금방 더워지는, 포근하고 따뜻한 목장. 하지만 지구에 이제 그런 곳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어두운 공장에서 태어나 공장에서 죽는다. 축산 동물들이 처한 끔찍한 환경을 사람들은 모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알고자 해도 알기가 쉽지 않다.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상처 입고 병들고 거의 미친 상태인 동물들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분명, 살아 있는 어떤 존재에게 그런 고통을 가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고통당하고 있는, 잔인하게 죽임당하는 동물들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충격을 받거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나는 가끔 비거니즘에 관하여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도서를 추천해주려고 하거나, 유튜브 링크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나를 막는다.

그거 보면 이제 고기 못 먹을 것 같아.


진실을 대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지 알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상자를 열기 전에 이미 뭐가 들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사회문제에 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다. 나의 행동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고,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종차별주의적이며, 인권에 관하여 말하지만 어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회피를 통해 부정한다. 나는 우리가 진실을 피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기만적으로 살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비건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나는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하는지 고민이 컸다. 나의 한가지 바람은 이 글을 읽은 후, 당신이 비건이 되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환경・비거니즘 관련 글 몇편을 읽고 아쉬움을 느꼈다. 기후변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있어서이다. 물론 그의 피로감에 공감한다. 비건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심하게 자책하거나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비건이나 환경운동가는 이따금씩 갖가지 비아냥거림을 듣게 되므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방어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글을 읽고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생길지 모르는데, 지면에서 자기변명은 아깝다고 느껴진다.

비거니즘은 평등을 위한 실천이다. 윤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비건은 무언가에 도달하여 달성한 상태가 아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으로 쉽게 정의되지만, 나는 시인인가? 시인은 단지 시를 쓰는 사람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비건도 마찬가지다. 비건의 뜻은 사전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내가 이미 비건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에도 내가 정말 비건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다. 완벽한 비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비건은 비건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이 당연한 명제는 당연하지 않다. 사람들은 소리친다. 노동자의 생명은 소중하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여성의 생명은 소중하다. 트랜스젠더의 생명은 소중하다. 동물의 생명은 소중하다. 정말로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면 이런 외침은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그러나 언제나 더 소중한 생명이 있었다. 인간의 생명이 그러했고, 백인의 생명, 남성의 생명이 그러했다. 무언가를 폭력으로 착취하는 사유의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닮아 있다.

나는 이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이러한 폭력이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고리를 모두 끊어내는 것이 비거니즘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들은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 하나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남는 질문들

 

3 함께 살게 된 ‘오디’를 소개하면서 “드디어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독특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따로 있을까?

성다영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었지만(아직 죽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고 언제나 느끼지는 않았다. 어떤 존재가 나도 생명을 가진 존재다,라고 외칠 때의 생명이란, 단순히 생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때 생명은 존엄을 의미한다. 단지 살아 있다고 해서 존엄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와 같은 표현을 썼다.

3 비건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책하거나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는 언급이 있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공유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순간들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궁금하다.

성다영 건너오지 못했다. 여전히 자괴감에 빠진다. 텀블러를 놓고 나왔을 때, 실수로 동물로부터 나온 성분이 들어 있는 음식이나 옷을 샀을 때, 논비건인 사람들과 비건 옵션이 있는 곳에서 밥을 먹으면서 ‘오늘은 다 같이 비건 음식을 먹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하지 못했을 때, 논비건 시절에 쓴 시나 소설을 다시 보다가 인간중심적인 표현들을 발견했을 때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내 이름으로 나온 책이 아직 없어서 참 다행이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 밥’이란 말에 ‘인간다운 삶을 갖추었음’이 함의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비건 되기’가 무엇을 밥으로 먹느냐를 문제 삼는 실천 양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런데, 그렇다면 ‘비건 되기’란 ‘인간다움’ 자체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글에서 그 내용을 언뜻 비쳐주었지만, 우리가 새롭게 상상해야 할 ‘인간다움’ 혹은 ‘인간’이란 무엇일지 조금 더 듣고 싶다. 

성다영 나는 인간답다는 말을 거의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 동물을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 세월호 추모 공원을 세우려고 하자 그 지역의 사람들이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때 정말로 인간답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을 믿고 싶고 가끔은 나도 모르게 인간을 믿는다.

내가 상상하는 인간다움이란, (비)인간적인 장면을 보았을 때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불의와 손을 잡지 않는 것이다. 손을 잡았더라도 반성하고 다른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도 폭력을 행하는 주체가 될 가능성을 자각하고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다영
시인. 201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 이매진 2018.
 
2) 멜라니 조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모멘토 2011, 31~32면.
 
3) 가부장제와 육식주의의 연관성에 관하여 더 알고 싶다면 앞서 언급한 캐럴 제이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를 참고하길 바란다.
 
4)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59면.
 
5) 「코로나19로 출입통제된 인도 해변에서 바다거북 80만마리 산란」, 『경향신문』 2020.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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