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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되기’와 ‘동물-되기’

채효정
2020년 06월 11일
 



‘사람-되기’와 ‘동물-되기’


정치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

대학교 1학년 첫 수업 시간에, 나는 낯선 외국어를 하나 배웠다. ‘폴리티콘 조온(politikon zoōn)’이라는 고대 희랍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로 번역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명제는, 사람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에 얽매여 살아가야 하는 생명의 존재이지만 정치공동체를 형성하고,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동물적 삶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조온’, 즉 ‘살아 있다는 것’은 지상의 모든 생명 존재들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폴리티콘’, 즉 ‘정치적인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며,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정치를 할 수 있지만 동물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동물에겐 정치적 권리라는 것도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먼지가 정치적 의제로 등장하고,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 탄소정상회담을 하며, 새롭게 출현한 바이러스가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세계질서를 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 그 ‘조온’들을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포함해야 하며, ‘동물과 함께 하는 정치’로서 생명(들)의 정치를 상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폴리티콘 조온’은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다’라는 말과 늘 함께 짝을 이루었다. 우리가 정치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로고스, 즉 이성과 말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야수들의 세계에서 사자는 힘으로 왕이 되지만, 우리는 그런 왕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인간은 토론하고 설득하며 의견을 모은다. 우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야수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화된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교수들은 늘 그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인문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이런 식의 조온과 폴리티콘의 구도가 불편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조온에 가까운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였고, ‘사람-되기’의 노력이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요구할 때였다.

나는 대학교를 1학기 다니고 나서 고향 말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열심히 서울말을 배웠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웃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말은 ‘동물에 가까운 말’이었다. 고대의 문명인인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말을 모르는 외국인들을 ‘바르바르’(barbar) 하고 알아듣지 못할 짐승의 소리를 낸다고 해서 ‘바르바르인’이라고 불렀다. 꿀꿀거리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야만인’(barbarian)의 최초의 뜻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자에서 왔다. 나의 말도 그랬다. 하루는 교수가 내가 쓴 리포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글을 꼭 남자처럼 글을 쓰는군.” 칭찬이었다. 동물(여자)인데도 인간(남자)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칭찬. 여자의 말도 그런 말, ‘바르바르’처럼 뭉개져 뜻이 아니라 소리로 들리는 말이었다. 말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점점 내가 가진 많은 말들을 부정하고 잊어버려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세계엔 그렇게 말을 빼앗긴 존재가 얼마나 많은지. 애초에 그들은 말을 갖지 못한 자가 아니라 빼앗긴 자였다.


짐승과 주권자

‘사람-되기’는 종종 ‘동물-되지 않기’로 이해되었다. 동물은 생각이 없고, 말을 못하고, 감각은 단순하며, 자연의 법칙과 타고난 본능에 충실하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된다. 문명과 발전의 관점에서 사람-되기는 그런 동물로부터 뛰쳐나오는 일이었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동물에서 인간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이성의 존재, 말로 하는 정치, 그것이 곧 ‘사람-되기’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동물은 결여의 존재로 표상된다. 동물은 이성이 없고, 말을 못하며, 법과 윤리와 도덕이 없다. 그래서 그것들은 정치도 없다. ‘그것들’은 이름 없는 자들을 부르는 말이었고, 사람이 덜된 존재를 부르는 말이었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원주민들과 노예들과 짐승들이 그렇게 불렸다.

이는 발전주의나 진보주의 관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사람으로 만들려면 지식과 교육이 필요한데, 그런 교육을 인문교양교육이라 하고 ‘후마니타스’(humanitas)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가 받고 있는 많은 인문교육, 시민교육은 그러한 ‘사람-되기’에서 시작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권리는 자유인의 조건이다. 자유의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는 그 자유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발생할 때다. 한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다른 인간의 자유를 박탈해야 할 때,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개인의 해방을 우리는 참된 자유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급과 젠더와 인종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며, 당연히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상호 자유롭지 않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관계를 구성하거나 해체하는 일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 관계를 새롭게 상상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정치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처럼 ‘동물과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자유는, 자유를 오직 개인적인 것으로 승인함으로써 개인이 성취한 자유의 이면에 있는 폭력적 관계들을 감춘다. 시민의 자유는 비시민의 부자유를, 남자의 자유는 여자의 부자유를, 제국의 자유는 식민지의 부자유를, 자본가의 자유는 노동자의 부자유를, 인간의 자유는 동물의 부자유를 은폐한다. 은폐의 공식은 전자에 대하여 후자를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가치 박탈을 통해 ‘자유인’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보호와 지도가 필요하다. 과거엔 신분과 혈통에 따라 구분되었던 ‘그분들’과 ‘그것들’ 사이의 위계는 오늘날 능력주의로 포장되었을 뿐이다. 지배자들은 그들의 다스림을 받는 타자를 언제나 인간성을 결여한 짐승으로 표상한다. 지배층 인사들이 종종 입에 담아 구설에 오르곤 하는 ‘민중은 개, 돼지’라는 말은 비유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그들에게 ‘그것들’로 불리는 자들은 동물에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겨진다. ‘그것들’은 생각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탁월한 자의 지배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의 위계는 연쇄적이고, 따라서 착취도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아이를, 아이는 동물을, 약자는 더 약자를 학대한다. 강자로부터 약자에게로 끊임없이 전환되는 이러한 연쇄적인 착취의 관계를 해체하고 새롭게 관계를 재구성하려면, 그것은 누구의 해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까. 당연히 가장 최종적인 피착취자, 정치적 최약자들과 무권리자, 가장 동물에 가까운 존재, 동물 그 자신으로부터일 것이다. ‘동물-되기’는 바로 그 동물로서, 동물과 함께 해방되기 위한 모든 동물적 존재의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다 인간답게 살 수 없고 ‘정치적 삶’이 일부에게만 허락된 사회라면, 폴리티콘은 일종의 ‘특권적 삶’이 된다. 어떤 이들의 사람-되기가 다른 이들의 사람-뺏기로부터 가능한 것이라면, 또는 다른 말로 어떤 이들의 인간화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비인간화가 강제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확보된 인간의 조건을 통해 과연 우리가 인간다운 삶이라 부르는 것에 이를 수 있을까? 조온과 폴리티콘의 대립은 시민권과 자연권을 대립시키고, 인권과 동물권을 대립시킨다. 국민은 비국민의 존재를, 시민은 비시민의 존재를, 인간은 비인간존재를, 각각 반대쪽에 탄생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특권적 권리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사태는 마스크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재난수당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노동권도 마찬가지다.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노동의 권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박탈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보편이라 생각했던 권리가 그것이 없는 자로부터 발생하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권리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가지지만 다른 동물들은 예외가 되는 권리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에(zoe)를 ‘단순 생명’으로 격하시키고, 정치적 삶인 비오스(bios)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고대의 풍조는 아니다. 이런 해석은 근대 철학자들의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물의 지위가 지금처럼 낮았던 적은 없다. 고대 라틴어로 동물을 의미하는 ‘아니말’(animal)에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깃들어 있는 창조의 신비와 ‘영혼(anima)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그 존재의 의미가 박탈되고, 생각도 감정도 없는 덩어리로 환원된 사물(res extensa)이 되었을 때, 동물적 삶과 인간적 삶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우열의 관계로 나타난다. ‘존재(ens)에서 사물(res)로’의 이행은 존재의 사물화라는 인식론적 변화만이 아니라 생명의 상품화라는 자본주의적 실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관계의 변화 이후에야 종차는 비로소 차별의 근거가 되고, 인간의 비인간동물에 대한 무시무시한 폭력도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법’이다. 17세기 유럽의 노예 무역상들은 자신들이 신대륙에서 조달하는 무역품 중 인간의 모습을 한 물건이 참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국왕과 교황에게 칙령으로 보증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는 법률가들이 인간과 짐승을 나누는 판결자가 되었다. 재판관들은 말을 못하는 야만인은 인간의 징표인 이성의 부재를 증명한다는 ‘과학적 논리’를 법적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노예는 ‘합법적으로’ 짐승이 되었다. 

‘동물과 인간’이라는 구도는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동물이면서도 정치적 주체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짐승과 주권자’는 ‘동물과 인간’의 생물학적 구분을 정치적 관계로 전환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동물은 자연에서 태어나지만 짐승은 주권자에 의해서 창조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벌거벗은 생명’도 시민에서 짐승으로 환원된 존재다. ‘벌거벗음’이란 시민의 보호복인 법이라는 옷이 벗겨진 자를 의미한다. 두뇌와 영혼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자는 한마리의 짐승이 될 뿐이다. 동시에 이것은 주권이 짐승에 의해 탄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 수 있는 자만이 주권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도 시민권도 없는 자,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자, 그들이 곧 짐승이다. 짐승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 아니라 정치적 권리가 없는 모든 무권리의 존재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도 짐승도 아닌 혼성체들이 출현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물어볼 수 있게 된다. 현대 세계의 주권자는 누구이며, ‘시민인 인간’과 ‘짐승인 인간’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 아마도 완전한 시민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존재는 이미 인간보다 동물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오늘날의 주권자는 국민국가의 영토를 넘어서 세계를 통치하는 시민들이다. 이 시민권을 규정하는 것은 법적 권리며, 법인이라고 불리는 기업은 법적 개인으로서 인간으로, 시민권자로 대접받는다. 기업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주체이자 완전한 시민권자다. 자본의 영토는 지구 전체고, 글로벌 자본은 지구의 주인이다. 그 힘이 의회나 민주적 선거 같은 정치의 상징을 통해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자본의 주권적 힘은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존재의 위치와 이동을 결정한다. 그 자본-권력이 생명을 대하는 방식은 그들의 영토 내에서 그들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개인들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오늘날 자연에 대한 파괴와 동물에 대한 착취는 인간 본성의 잔혹함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를 상품으로 만들고, 생명으로부터 이윤을 수탈하는 자본주의적 잔혹함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결과다.


‘인간 대 동물’의 구도가 은폐하는 것

하지만 모든 것을 ‘체제의 탓’으로 돌리거나 최후의 악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모순처럼 개인은 죄가 없고 우리 모두가 공범이라는 집단면책의 결과가 생겨난다. 여전히 ‘사람-되기’는 성찰해야 할 중요한 물음이다. 하지만 그 ‘사람답게 살기’의 이상이 현실에서는 서구의 시민적 생활양식을 전형으로 한다는 사실도 간과되어선 안 된다. 울리히 브란트(Ulrich Brand)와 마르쿠스 비센(Markus Wissen)은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전지구적인 식민화와 착취에 기반하는 ‘제국적 생활양식’이라고 말한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서구의 엘리트들은 ‘빈곤의 탈피, 생활수준의 향상, 교육・의료・보건 수준의 향상’과 같은 목표를 전세계적 차원에서 수립한다. 그러나 유엔의 밀레니엄개발목표가 보여주듯이, 전지구적인 문명의 향상은 언제나 전지구적 발전주의 전략과 상응하고, 전지구적 낙후화와 동시에 전개된다. 부유한 사람들은 구원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받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누가 만든 가난인지는 묻지 않는다.

관계를 바꾸지 않는 한, 이 인간화는 언제나 동물화와 함께 진전된다. 이때 동물화란 주체적인 ‘동물-되기’가 아니라 ‘짐승으로 만들기’를 뜻하며, 삶터로부터 추방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키며, 언어를 박탈하고, 역사를 지우고, 시간을 착취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충분히 사유하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조건들을 상실한다. 사회 안에 출현하는 괴물들은 인간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짐승 같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동물에 대한 잔혹함은 인류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도 아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와 우열의 관계는 양자가 동등하고 상호대칭적인 관계를 맺는 사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류학은 인간과 동물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소통하면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수많은 사회의 흔적을 보고한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1)는 숲의 생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통의 사유를 전개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마존 숲에서 살아가는 루나족이 사용하는 ‘루나’라는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고 재규어의 이름이기도 하다. ‘루나 -인간’은 ‘루나 -재규어’와 주체성을 교환한다. 재규어에게 자신과 같은 포식자로 식별되지 않는다면 ‘먹히는 자’가 되기 때문에 이들에겐 ‘재규어처럼 생각하기’가 필수적이다. 루나-인간과 루나-재규어는 서로 언어를 교환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문자기호(symbol)가 아니라 신호(sign)를 통해 대화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루나족의 미개한 종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호와 신호를, 즉 인간의 말과 동물의 말을 동시에 사용하는 다중언어자임을 나타낸다. 아마존 숲속에서 언어의 결핍은 오히려 이들을 관찰하는 서구의 학자에게 두드러진다. 재규어의 말(sign)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재규어와 소통하는 숲의 다른 존재들의 신호(sign)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숲의 언어는 그물처럼 확장된다. 루나들에게 생각은 자아 속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만남 속에서 발생하고 공유되는 것이다. 아마존에서 루나-인간과 루나-재규어는 서로 다른 종으로 분류되지 않으며 ‘루나-푸마’라는 하나의 종족으로 인식된다.

이런 수평적인 관계가 부서지고, 동물의 지위하락이 시작된 것은 존재(being)를 사물(thing)로 바라보기 시작한 근대적 인식론의 사건이며, 동시에 자연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양식과 함께 대두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어떤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장식 축산과 분업화된 도살장, 대량살처분 같은 이 끔찍한 동물착취의 원형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대량생산체제인 포드 시스템은 동물을 ‘효율적으로’ 대량 도살하던 시카고 도축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시카고의 대량 도살장은 어디서 그 모델을 가져온 것일까? 영화 「모던 타임즈」(찰리 채플린 연출, 1936)에서 찰리 채플린은 움직이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못한 채 요구되는 단순 조립 동작만 반복하다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미쳐갔다. 동물 착취의 시스템은 노동 착취의 시스템과 완전히 동일하다. 생명으로부터 필요한 생산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다.

공장과 도축장은 역사적으로 하나의 공통적 모델을 갖고 있다. 마커스 레디커(Marcus Rediker)의 『노예선』2)은 생명에 대한 자본주의적 폭력과 테러가 탄생한 장소로서 노예선의 구조와 원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노예선의 구조와 원리는 모든 수용소의 구조적 원형이다. 노예선은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짐승들을 집어넣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최적화된 시설이다. 노예는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폐사율을 적정 비율로 유지하는 것이 노예선의 관리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짐승들은 주인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감정이 있는 존재이기에 혁명을 일으키고, 탈출을 시도하고, 스스로 자살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약한 동료들을 향해 터뜨려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폭력뿐이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정신이 나가도록 만들지 않으면 이 생명들의 에너지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직접적 폭력과 더불어 약물과 오락, 소비중독 등 다양한 비폭력적 기술이 동원되지만 근본적으로 노예관리술은 현대 기업의 노무관리술과 대량사육기술의 원형이다.

동물에 대한 전쟁과 인간에 대한 전쟁, 동물에 대한 집단학살과 인간에 대한 집단학살은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함께 전진해왔다. 개, 돼지를 멸시하는 자들은 자신들에게 개, 돼지와 마찬가지인 민중도 그렇게 취급한다. 오늘날 ‘더러운 노동’에 배치된 노동자들도 자신이 처분하고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용자들로부터 감정도 없고, 영혼도 없고, 생각도 없는 짐승처럼 다뤄진다. 살기 위해 무감각해진 노동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잔혹한 일들을 기계적으로 처리하거나, 자신이 당한 일을 동물들에게 복수한다.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자기의 동료에 대한 학대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다. 축사나 도살장의 노동자들에게서 끔찍한 잔인함이 보이는 것은 양계장에 갇힌 닭들이나 모피를 위해 사육되는 여우들이 동료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부리나 꼬리가 잘린 동물들처럼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은 노동자의 인간성을 거세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 대 동물’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대 생명’의 문제다.


자본의 통치에 맞선 생명(들)의 정치

이 지옥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동물에서 벗어나는 ‘사람-되기’가 아니라, ‘동물-되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우리를 사람으로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강이 되고 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벌레가 되는 것, 닭이 되고 돼지가 되는 것, 먹는 자가 아니라 먹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착취자가 아니라 피착취자의 편에 서게 되면, 먹히는 자들의 연대는 비로소 가장 최후의 포식자를 드러낸다. 맨 위에는 가장 탐욕스러운 포식자가 우리를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강제하고, 흡혈귀처럼 생명을 끝없이 빨아먹으며 배를 불린다. 맨 아래는 가장 많이 먹히는 존재가 있다. 그들의 자리야말로 모든 존재의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자리다. 그래서 동물-되기가 사람-되기의 시작이다. 지금 그런 존재가, 아무런 권리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한 생명체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코로나19’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다. 동물-되기는 바이러스를 제거하거나 통제하려는 관점을 버리고 바이러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바이러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바이러스처럼 취급되는 존재의 말도 함께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후위기와 지구온난화가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 저지른 죄악에 대해 신이나 자연이 내리는 징벌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인간 대 동물, 인간 대 자연으로 대립구도를 설정하면 결국 지구를 살리기 위한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인간이 멸종하는 것이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안소니 루소・조 루소 연출, 2019)에서처럼 인구의 절반을 먼지로 되돌리는 기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나 기후위기를 인간이 초래한 문제로서 성찰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자연의 경고로 해석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신적 존재로부터의 징벌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또다른 위험을 가져온다. 기술적 개입으로 지구 생태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자연을 절대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그것은 자연의 생명 존재들과 공동의 정치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통의 존재가 다른 고통의 존재에게, 생명이 또다른 생명에게, 비인간동물이 인간동물에게, 함께 힘을 합쳐 이 생명에 대한 착취를 중단시키자고 연대를 청하는 신호라고 해석해야 한다.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이 말했듯이 만물은 서로 돕고자 하는 존재이므로. 그때 ‘동물-되기’는 자연세계의 바깥에 서 있는 자, 아직 시민이 아닌 존재들을 정치적 주체로 공동의 정치세계에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 정치를 재구성하기 위한 ‘주체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어원에 들어있는 ‘데모스’(demos)라는 말은 ‘집을 짓다’(demō)라는 말에서 왔다. 그 집은 마을이고 지구이며 우주다. 그 집을 함께 짓는 모든 존재가 데모스이다. 당면한 위기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면, 이제 우리 공동의 집(commune)을 함께 짓는 일에는 시민이 아닌 존재들과, 인간이 아닌 동물-주체들이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만든 아테네의 데모스도 원래는 고귀한 자들로부터 ‘짐승 같은 것들’이라 불렸던 사람들이다. 동물의 정치는 정치를 고귀한 자들의 독점에서 민주주의로 탈환하는 정치의 시작이다. 그것은 쌀과 밀과 보리의 말을, 소와 닭과 돼지의 말을, 여자와 아이의 말과 소수와 빈자의 말을,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말과 수많은 잡종과 ‘루나의 언어’들을 정치의 세계로 초대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지구의 위기, 생명의 위기는 이 존재들의 정치적 발화다. 생태적 위기는 죽음을 멈춰 세우기 위한 자연의 파업이며 생명들의 정치적 반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반란에 동참하기를 요청하고 싶다. 죽음의 체제에 저항하는 생명들의 연대만이 ‘생명에 대한 권력’을 중단시키고 ‘생명들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는 질문들

 

3 비인간동물의 문제가 오늘날 어떻게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 속에서 재배치되고, 법의 언어로 지지되는지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나 기후위기를 “신적 존재로부터의 징벌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서도 지금 우리가 잘 숙고하고 분별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아 흥미로웠다. 이 대목을 비인간동물의 문제를 일종의 ‘생태주의’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읽을 수 있을까?

채효정
「인간」(Man)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이 있다. 2012년에 스티브 커츠(Steve Cutts)가 만든 3분 정도의 짧은 영상인데, 생태주의 교육에 많이 쓰는 자료이기도 하다. 50만년 전 지구의 모든 존재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을 때 한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 폭력배처럼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한다. 흥겨운 음악을 배경으로 지구의 깡패는 태연하고 뻔뻔하게, 그야말로 심심풀이로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생명을 죽이고 지구를 더는 파괴할 것도 없는 쓰레기만 가득한 행성으로 만들고 나서야 이 포악한 독재자는 파괴를 멈추고 왕좌에 앉아 스스로 왕이 된다. 중간중간에 문명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하는 장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은 모든 인간을, 모든 지구 생명의 적으로 상정한다. 마지막에 그는 외계인들로부터 자기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이런 관점은 자연을 타락한 인간에 대해 순결하고 순수한 존재로, 동물을 자연의 법칙을 거역하지 않고 섭리에 따라 사는 존재로 환원한다. 결국 자연이란 영원히 원초적인 에덴동산이고, 그 질서를 어지럽힌 영원한 원죄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아이들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바라보거나, 고갱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타히티의 여자들처럼 원주민들을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존재로 표상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자연을 백지로 여기는 관점이다.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근대 이전의 농경도 대지에 대한 착취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본다면 인디언들의 곰 사냥과 돈을 벌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남획하는 백인 침략자들의 사냥이 구분되지 않고, 자연의 공동 살림으로서의 소농과 식품산업에 종속된 기업농도 구분되지 않는다. 자연을 절대적 주체로 만드는 것은 비주체화하는 것과 동일하게 상호적인 관계성을 수립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생태주의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서구 근대 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작된 것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에코페미니즘, 정치생태학 등 다양한 계보를 가지고 있다. 생태주의와 분리해서 생각하기보다, 징벌하는 절대자로 회귀하는 정치신학과 섭리에 충실하도록 명령하는 경제신학(oikonomia)으로부터 생태주의를 분리하고,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조온의 폴리티콘’으로서 생태정치를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 “생명들의 정치적 반란”에 ‘인간동물’로서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의 주요한 키워드가 “주체의 재구성”일 것 같다. 이것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혼종적 주체’나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포스트휴먼’ 식의 논의와 어떤 교집합이 있거나, 혹은 다를지 좀더 설명을 부탁한다.

채효정 당연히 교집합이 있다. 특히 도나 해러웨이는 이 반란의 기획에 많은 영감을 준다. 해러웨이는 인간/동물, 문화/자연, 문명/야만, 남성/여성, 서구/비서구, 말/소리, 이성/감성, 리터러시/일리터러시 등으로 파생되는 서구의 이분법을 해체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렇게 깔끔하게 그어진 분할선 위에서 출현하는 혼종적 존재들에 주목하며 주체화하려고 노력해왔다.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러나 또한 인간이면서도 동물인 존재들은 기존의 범주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체계를 교란시킨다. 이와 같은 주체의 재구성은 억압된 자들이 해방하기 위한 기획이기도 하다. 그들의 있음과 나타남 자체가 기존의 사회질서에 충격을 가하며, 새로운 범주와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의 혼종적 주체는 또한 관계적 주체다. 주체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체가 해명된다. 서구 철학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있음(being)과 됨(becoming)’ ‘존재와 시간’ 사이의 근원적인 대립과 긴장은 ‘됨과 함께 되어감(becoming-with)’의 구도로 이행한다. 자연과 사회, 과학과 정치의 근대적 분할에 문제를 제기해온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도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에서 코기타무스(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로’ 나는 생각한다 주체의식의 구성 형식을 전환한다.

해러웨이는 친족화라는 개념으로 반려견 카렌과 자신을 재범주화하는데, 아메리카 양치기 개의 후손인 카렌과 백인 침략자의 후손인 해러웨이는 ‘정복자’로 재구성된다. 또한 그들은 목덜미에 마이크로칩이 이식된 개와 운전면허증에 신분을 확인받을 수 있는 시민으로서, 국가에 의해 셈해지는 생명통치의 안전관리 대상으로 동일 범주에 묶일 수도 있다. 등록된 개와 등록된 주민의 반대편에 출현하는 것은 등록되지 않은 개와 인간들이다. 그 사이에는 등록되어 있지만 다른 식으로 관리되는 인간/비인간 동물들이 존재한다. ‘죽여도(죽어도) 되는 동물’로서 관리되는 동물들, 그들은 ‘죽이기 위해 살도록’ 강제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아니라 죽여도 되는 동물과 죽이면 안 되는 동물, 죽어도 되는 동물과 죽으면 안 되는 동물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죽여도 되는 동물과 죽어도 되는 동물이, 죽이면 안 되는 동물과 죽으면 안 되는 동물에 대해, 함께 저항의 주체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친족화 개념은 종을 횡단하는 주체의 재구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시아의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은 산촌에 사는 여성으로서 나는, 해러웨이와 다른 방식으로 ‘친족적 뒤섞임’을 경험한다. 해러웨이가 상상하는 것이 나에겐 감각과 경험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보다는 애니미즘(Animism)에 가깝고, 서구 시민들의 생활양식보다는 민중적 세계에 좀더 가깝다. 따라서 각자의 친족 범주도 다르게 구성될 것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렸던 대담에서 대담자들은 아이들의 똥을 먹는 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개들은 집 안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지만 ‘반려견’은 아니며, 구조와 입양 훈육의 과정도, 마이크로칩도 없다. 놀라운 것은 이 개들이 아이들이 싼 똥을 먹는데, 사람들도 그것을 싫어하지 않고, 개들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담자들은 이 ‘기저귀 개’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미국에서 결코 생태적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낯선 개들이 나에겐 친숙한 개들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똥개’나 ‘똥돼지’라고 부르는 가내 동물들이 집집마다 많았다. 우리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를’ 먹었다. 이런 뒤섞임은 해러웨이와 반려견의 그 유명한 세계적 키스와는 다른 친족적 뒤섞임이지만, 역시 혼종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일본의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는 늑대, 여우, 곰과 친족 관계인 일본의 산촌 부족들에 대해 알려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곰과의 결혼에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곰은 에스키모와 인디언 부족들의 설화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아메리카의 정복자인 해러웨이와 카렌과 달리 곰과 인디언은 그들과 ‘같은 아메리칸’이면서, 동시에 ‘같은 피정복자’다. 이때 인디언에게 ‘같음’이란 개념은 같은 인간인 백인 정복자보다 같은 종족인 곰에 먼저 닿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곰을 친구로 여기고 수호자로 여기며 숲의 왕으로 숭배하지만, 그들은 곰을 사냥하고, 고기를 먹고, 가죽을 벗겨 입고, 발톱으로 목걸이를 만든다. 이것은 그들이 훌륭한 곰의 삶과 혼을 나누는 방식이다. 루나족이 ‘루나-푸마’를 같은 종족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야만의 징표라고 할 수 있을까?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분할선 위에서, 종종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 또는 동물에 가까운 인간이 출현했다. 정상인간은 이 동물인간을 완전한 인간이 아닌 존재, 비정상인으로, 장애인으로, 하나의 질병으로 쉽게 규정한다. 그들은 늑대인간, 마녀, 사튀로스로 동물의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동물을 통해 신적인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 쥐나 뱀, 박쥐, 벌레들처럼 함께 살지만 섞이지 않는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들이다. 이 혼성적 존재는 때로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이기도 하고, 노예의 후예들인 흑인이나 인디오들이기도 하며, 때로는 집시나 유대인이기도 하고, 무슬림 이민자이기도 하다. 소수자에겐 어김없이 동물들, 열등한 동시에 불길한 동물들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그 반대편에서 출현하는 것은 반신반인이다. 그들은 자기의 몸속에 신들의 계보를 가진 고귀한 사람들, 귀족이다. 옛날의 귀족들은 혈통을 통해 신들의 가계와 연결되었지만, 현대의 사회귀족들은 돈이 그에게 신성한 피를 흐르게 한다. 덕분에 그들은 더 오래 살고, 더 아름다우며, 모든 면에서 더 탁월한 인간처럼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그것이 각자의 노력과 능력에서 온 것처럼 그들을 ‘엘리트’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사회지도층으로 대접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동물과 ‘동물 같은 인간’은 똑같이 한덩이로 보인다. 개, 돼지, 민중이 모두 구분되지 않는 ‘짐승들’이다. ‘짐승 같은 놈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예를 부르거나, 백성을 부르는 말이다. 또한 그것은 흑인을 부르는 말이고, 조선인을 부르는 말이며, 베트남인을 부르는 말이고, 지금은 이슬람을 부르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동물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날카로운 구분선은 종적 구분이 아니라 실은 계급적 분할선이다. 혼종적 주체성은 새로운 지배의 구도를 드러내고, 그것을 계급적 범주로 재구성하여 정치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들의 정치적 반란에 동참한다는 것은 착취당하는 인간/비인간 동물의 계급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것이 글에서 말했던 ‘생명들의 연대와 동물-되기’의 의미다.

3 오늘날 미디어 표상으로서의 동물 문제에 대해서도 간단히 덧붙여줄 수 있을까?

채효정 미디어가 왜곡하는 동물 이미지는 의인화나 인형화, 포르노 등 이미 많이 언급된 바 있다. 한돈이나 한우 캐릭터 인형이 자기 살을 들고 활짝 웃으며 소고기 돼지고기 먹으러 오세요, 손짓한다. 비프는 소를, 포크는 돼지를, 치킨은 닭을, 군침 넘어가는 먹방은 자신이 먹고 있는 생명 존재들의 비참한 삶과 잔인한 죽음을 은폐한다. 최근 그런 종류의 왜곡 효과와 조금 다른 맥락에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은 ‘동물 포르노’라 부를 만할 고발 저널리즘의 사진이다. 삐쩍 마른 몸에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난 백곰이 더러운 주둥이로 쓰레기를 뒤진다. 멍한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그 곰은 예전에 우리가 알던 북극곰이 아니다. 에스키모와 인디언들에게 왕으로 대접받던 곰은 왕에서 거지의 몰골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신사에서 부랑자로 전락한 펭귄도 있다. 신사의 의복 턱시도를 입은 듯한 외모 때문에 유럽 부르주아들의 사랑을 받았던 펭귄도 윤기 나는 털을 잃고, 얼음이 녹아버린 남극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누추한 모습으로 카메라에 잡혔다. 이보다 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은 없다. 이런 사진은 삶터를 잃고 영광도 잃어버린 동물들을 향해 한없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작가들이 찍은 사진들이다. 나는 그런 사진들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변함없는 문법을 읽는다. 그것은 서구가 서구 바깥의 오지를 바라보는 시선, 문명이 야만을 바라보는 시선,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불쌍한 북극곰과 펭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후위기의 실상은 아프리카의 가난과 절망을 전시하는 빈곤 포르노와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아프리카의 가뭄과 전쟁과 빈곤의 원인이었던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은폐하고 가해자를 구원자로 둔갑시키는 ‘원조의 미학’과 동일하게, 지구와 자연을 착취해온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를 은폐하고, ‘전체 인류’를 자연의 공동 적으로 만들면서 가장 큰 약탈자를 가장 큰 구원자로 둔갑시키는 미학적 기술이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존재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동정이 아니라 죄책감이어야 한다. 그것이 ‘포르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존재의 역사적 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제거해버린 채로, 그들이 존재하는 장소를 역사와 단절된 무대와 같은 곳으로 만들고, 관람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직 이미지의 감각만을 취하여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솟구치게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곳에 있을 때는 무고한 희생자이고 동정의 대상이지만 지중해를 넘어 유럽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면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순수의 표상은 곧바로 불순으로 바뀌고, 무해한 자에서 위험한 자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뒤바뀐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무런 두려움도 느낄 수 없는 존재인 귀여운 강아지, 불쌍한 돼지들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을 때 우리가 그들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은, 비로소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주체적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 자율성과 자발성을 재해석하고 동물을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표상들에 미학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예술적 작업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술이야말로 연대와 공존의 기술이자 생명의 정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술이 다시 되어야 한다.

 

 
채효정
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지은 책으로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다
 

 


1) 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
 
2) 박지순 옮김, 갈무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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