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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김미정
2020년 06월 11일
 



2019년 제작된 모 기업 광고를 무심코 보다가 살짝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1분 남짓한 광고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놀이공원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서로를 향해 반갑게 손짓을 합니다. 여자가 길을 가로질러 남자를 향해 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도로 맨홀 뚜껑에 하이힐이 걸린 여자는 휘청이고, 근처에 짐을 실어놓은 카트의 바퀴가 풀려 그녀에게 돌진합니다. 이 위기의 순간, 건너편의 남자가 여자를 구해내고, 카트는 바로 옆의 푸드트럭을 덮치며 긴박했던 상황은 종료됩니다. 위기를 극복한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며 이 광고는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두 남녀가 안전하게 재회한 대신, 근처의 푸드트럭 아저씨는 자신을 덮친 불행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봅니다. 이어 카메라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커싱합니다. 푸드트럭에서 과자더미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눈처럼 떨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두 손을 들고 환호합니다. 어른들은 심란한 표정을 짓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끌려 나왔을 프렌치 불도그의 표정은 무심합니다.

익숙한 감각에 의하자면 이것은 어떤 연인의 ‘만남-위기-극복-재회’의 이야기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변인들의 상황을 비추는 것은 불필요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광고는, 어떤 내러티브를 위해 무언가가 전경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으로 밀리거나 타자화되는 또다른 무언가를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이제까지 중심, 보편의 이야기라고 믿고 익숙하게 보아온 것들에도, 그에 연루된 무수한 관점에서의 이야기와 사연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작품 속 어떤 캐릭터가 그저 소비되지는 않는지, 작가의 시선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향하는지, 말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존재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누가 그 서사에서 이 세계의 취약한 고리를 담당하고 있는지 등등 다양한 서사 영역에서 분투하는 많은 창작자들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이 누구에게 소유되어왔는가 역시 중요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이고, 비단 문학에만 한정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저 광고에서 푸드트럭 아저씨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프렌치 불도그의 표정까지 비추어내는 것도 하나의 사례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한 상상력이 달라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수년간 문화예술계에서 페미니즘의 질문과 문제의식을 거치는 동안 누가, 혹은 무엇이 ‘인간’이었는지 ‘보편’이었는지 ‘정상’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종차(種差)에 기반하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도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성차를 정당화해온 방법이, 우리가 종차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얼마나 비슷한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둘을 전적으로 동일하게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논리와 이데올로기가 있는 한편, 그것의 결과로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압도적 비대칭성 역시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문학 3〕 2020년 2호 주목의 키워드는 ‘비인간동물’입니다. 반드시 이 주제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최근 수년간의 문화예술계의 의제를 돌이켜본다면, 지금 ‘비인간동물’에 대한 논의는 그저 서구 철학의 새로운 조명이나 소위 ‘동물로의 전회’(animals turn) 같은 (기존) 문제의식과는 다른 결에서 생각해야 할 이유도 분명합니다. 실제로 최근 한국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동물 이야기 역시, 이전의 익숙한 동물 표상들과 다른 것 같습니다. (당장 〔문학 3〕 2020년 1호의 소설들을 다시 열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지금 인간-비인간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상상해보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구상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목을 시작하는 정치학자 채효정의 글은 오늘날 동물문제가 자본주의적 착취구조와 근대적 법의 체계 속에 놓여 있음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비거니즘을 결단한 것이 세상의 모든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는 첫걸음이기도 하다는 시인 성다영의 진솔한 에세이가 이어집니다. 두 글은 이제까지의 세계가 구성되고 작동해온 원리를 근본적으로 짚어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법과 정치의 관점과 언어를 통해 ‘동물정치’의 필요를 설득력 있게 전하는 변호사 김도희의 글과, 인간 언어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말의 고안을 역설하는 독립연구활동가 심아정의 제안은 인간 -동물이 연루된 이 세계를 어떻게 다시 구상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의사 박종무가 인간 -동물의 관계를 전체 생태계의 문제 속에서 질문하며 오늘날 무수한 ‘위기’의 논의를 어떻게 연결지어 고민해야 할지 제안합니다.

이 소중한 문제의식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의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의 관계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이 세계를 새롭고 다르게 상상하고 구상할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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