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SHARE
3

서바이벌 가이드: 가정에서 살아남기

이소호
2020년 06월 24일



 
서바이벌 가이드: 가정에서 살아남기


머리말: 가족의 탄생 
전생에 죄 많이 지은 자가 이승에서 여자로 태어난다고 했던가. 필자는 1988년 유교 사상이 남아있는 장유유서, 남존여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모시는 엄마 사이에 태어난 딸 둘 중에 장녀로. 어쩌면 비극은 이렇게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응이 다가 아닌 바 이 글은 독립을 원하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아직 독립하지 못한 세상의 모든 2030 여성을 위해 쓰였다. 절망의 내부에도 한줄기 희망은 있다. 여기 구박데기 만렙의 필자가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생존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현명하게 버티며 함께 1인 가구의 빛나는 미래를 도모하자.

 
Chapter 1. 가족 구성원 이해하기
생존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현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안에 본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한 후 역할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기만 해도 맹목적인 비난을 어느정도 피할 수 있다.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가족 내 서열을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누가 집안일을 가장 많이 하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필자의 집을 기준으로 24시간 동안, 필자는 밥상 차리기 2회, 식후 커피 1회, 설거지 2회, 빨래 1회, 청소 1회 제공 및 집안일에 대한 불만족 평을 2회를 받았다. 1인 가구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것이 2인 이상의 가족 내의 일이라면 조금 문제가 된다. 한 사람이 대부분의 집안일을 챙기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 수치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 더 자세한 결과를 얻고 싶다면 집안일 수행시 들었던 가족 구성원의 말을 기억해보자. “나는 단 한번도 냉면을 삶아본 적 없다” “밥 차리고 설거지하는 건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지”와 같은 말은 집안에 이미 견고한 서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Chapter 2. 독립 목표 정하기
한번 정해진 서열은 집안이 망하지 않는 이상 바뀌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1인 가구로 독립을 추천한다. 그러나 조금 긴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준비했으면 한다. 독립보다 재독립이 어렵기 때문이다. 집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안정적인 주거 형태를 찾을 때까지는 버티는 것을 추천하며, 국가에서 지원하는 청년주택 행복주택 등 다양한 혜택이 있으니 알아보길 바란다. 그러나 장기전세 혹은 주택청약에 큰 기대를 갖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무주택 기간이 적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자녀가 없거나, 65세 이상의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30대 이상의 여성은, 하다못해 임신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청약통장이 1순위어도 당첨될 수가 없다. 미혼 여성에게 아파트는 그야말로 희망 고문에 불과하다.

 
Chapter 3. 나만의 벙커를 만들어라
즉각적인 독립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집 안에 방 하나는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다른 가족과는 화장실, 부엌만 공유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눈에 자주 띌수록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우므로 될 수 있으면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각종 간식거리와 생수를 쌓아두자. 냉장고 문 여는 횟수와 화장실 가는 횟수만 줄여도 반은 성공이다. 더불어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 확보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활용 방법과 효과에 대해서는 Chapter 6, 7의 ‘외부에 도움 요청하기’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필독 후 성공적으로 안락한 벙커를 구축하길 바란다.  

 
Chapter 4. 무기
조금 잔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무기는 돈이다. 집에 경제적으로 의지만 하지 않게 되어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 돈이 없다는 것은 사생활을 잃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필자가 돈이 없었을 때 얼마나 끔찍했는지 예를 들어보겠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집이 나오기 전, 청탁이 없어서 용돈 벌이도 불가능하던 그 시절, 필자는 매달 말이면 부모님이 용돈 명목으로 주신 카드의 명세서를 뽑아야 했다. 그리고 같이 형광펜을 들고 내역을 놓고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 이것이 얼마나 합당한 소비였는지 변명해야 했다. 여기서 멈춘다면 차라리 괜찮다. 필자의 부모는 ‘이소호’ 앞으로 택배가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미리 뜯어보고 사치가 심하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해결 방법은 단 하나였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이후부터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 안에서 최소한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틈틈이 일해두자.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지만, 또다른 무기로 과거의 상처를 적절히 이용하기를 추천한다. 과거에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겪었던 상처 되는 말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었다가, 혹시 본인에게 부당한 것을 요구할 때 꺼내 사용하면 여러가지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위급 상황에 필자가 부모님에게 되돌려주는 말로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뭐가 그렇게 억울해?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아도 싸지”와 “저거, 우리 집 돈 잡아먹는 귀신”이었다.

 
Chapter 5. 방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정도의 기술은 이미 모두가 갖추었을 것이라 생각하여 생략하고, 필자는 이에 하나 더 얹어서 생활 패턴 바꾸기를 추천한다. 보통 생활 패턴이 겹치면 눈에 더 띄어 잔소리를 듣게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모두가 약속한 듯이 12시간씩 자고 12시간 생활하지 않는 이상 활동 시간은 반드시 겹치게 되어 있는데, 이때 당신이 밤에 깨고 낮에 잔다면 아무리 밤새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은 ‘게으르다’ ‘논다’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컨디션 난조로 건강까지 악화하면 ‘낮에 자고 밤에 놀아서 그렇다’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Chapter 3. 나만의 벙커를 만들어라’ 편에서 행동반경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에 마주칠 기회는 현저히 낮다. 그러므로 눈에 띄는 순간에 집안일 수행 등을 통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성실함을 최대한 보여주자.

 
Chapter 6. 외부에 도움 요청하기 – 인간 편
눈치가 보인다고 해서 집에서 틀어박혀 있으면 돌아버리기 십상이다.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대화와 산책은 우울증 극복에 도움을 준다. 동네 친구를 만나, 나날이 퇴행하는 사회적 감각을 키워야 한다.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면 친구와 정기적으로 통화하여 현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씻거나 화장실을 갈 때 빼고 통화 상태로 뭐든지 함께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하거나 ‘Chapter 2. 독립 목표 정하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며 독립 의지를 확실히 다지자. 
 
위 지침대로 성실히 이행하였으나, 여전히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가까운 정신과에 가서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사실 전문가의 도움이야말로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Chapter 7. 외부에 도움 요청하기 – 미디어 편
인간관계를 통해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 도리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관계 안에서 오해의 씨앗을 틔우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철저한 고립이다. 이때 벙커 안에 구축해둔 전자기기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고민 상담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익명으로 하고, 여가에는 넷플릭스 유튜브를 비롯한 OTT 서비스를 활용한다면 지루할 틈이 없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영상 한편에도 집중하기 어렵다면 각종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해외 드라마를 보길 바란다. 특히 시즌이 5개 이상 나온 시리즈를 추천한다. 적어도 시즌 1, 2는 희대의 명작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미디어라고 하더라도 본인을 비롯하여 실제 친구들의 현실 생활이 쉽게 드러나는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등의 SNS 사용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고 비관하게 되어 쉽게 우울해질 수 있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면 ‘Chapter 6’으로 돌아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길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맺음말: 가정의 미래
가족이 가장 화목할 때는 언제인가. 주말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하는 일이 잘 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때? 아니다. 가족이 진정으로 화목할 때는 각자 떨어져 있을 때다. 명심하라. 이것은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가정의 영원한 비밀이다. 

 


이소호
2014년 『현대시』 신인 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캣콜링』이 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