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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오후 빛

강성은
2020년 07월 07일



겨울 오후 빛
  
  
  
저 오늘 또 죽었어요. 
  
네? 
  
오늘로 열아홉번째예요. 
  
아. 
  
그래도 오늘은 병원에서 죽어서 그냥 누워 있기만 했어요. 
  
피는 안 흘렸겠네요. 
  
네. 피 흘리면 지저분해지고 지우기도 힘든데 오늘은 아주 깔끔하게 죽어서 좋았어요. 병실 침대에 누워서 촬영 준비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데 창밖에 눈이 내리더라고요. 눈을 보니까 진짜로 죽을 때 병실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짜 죽음은 다를걸요. 
  
그렇겠죠. 그런데 너무 많이 죽어서, 아니 죽는 역할을 많이 해서 자신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죽는 역할 할 때 특별한 노하우 같은 거 있어요? 
  
그런 건 없는데. 
  
그럼 무슨 자신이 생겼어요? 
  
진짜로 죽더라도 연기라고 생각하면 별로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가짜로 죽어도 진짜로 죽는 것처럼 하잖아요. 
  
그래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죽으면 안 돼요. 소품이니까. 
  
소품? 
  
주인공은 아니니까, 단역이니까. 잠깐 나오고 죽어야 되거든요. 
  
왜 죽는 역할이 계속 들어와요? 
  
죽는 역할만 들어오는 건 아니에요. 살아 있는 역할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그냥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보단 죽는 사람을 한번 더 보게 되잖아요. 보는 사람들에겐 죽는 역할이 더 인상적으로 남아요.  
  
죽는 연습을 해두면 죽음을 좀 편하게 받아들이게 될까요?  
  
나는 이제 진짜로 죽더라도 별로 느낌이 없을 것 같아요.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남자는 장난스럽게 얘기하고 여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비밀 하나 얘기해줄까요? 난 벽이 된 적이 있어요. 
  
네?
  
벽이요, 벽. 
  
여자가 테이블 옆 벽을 탁탁 쳤다. 
  
아. 대사도 없었겠네요. 
  
연극 말고 진짜로. 
  
진짜 벽?
  
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방의 위치가 조금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벽에 붙어 있는 줄 알았는데 몸이 그대로 벽이 되었더라고요. 처음엔 놀라 어어어 했죠. 당황스러워서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비명이라도 질러야 되는지, 도와주세요가 나을지 살려주세요가 나을지 생각하다가 둘 다 외쳤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서 헬프 미라고도 외쳐봤지만 역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옥탑방에 혼자 살고 있어서 아무도 들을 수 없거든요. 어쩌면 벽이 되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꿈에서 깨거나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독히도 느리게 지나가더군요. 이게 꿈이라면 너무 길고 지루해서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마나 오래 벽이 된 거죠? 
  
겨울 내내. 두세달 정도요. 
  
그럼 밥도 못 먹었을 텐데.   
  
벽이 되었기 때문인지 배도 고프지 않고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나요?
  
딱히 찾아올 사람이 없기도 했고 막 겨울방학이 시작된 터라 가야 할 데도 없었어요. 제 안부를 물을 사람도 없고 제가 안부를 챙겨야 할 사람도 없고.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또 보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밤이 되면 텅 빈 어둠 속에서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도대체 왜 벽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어떻게 다시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인간, 인간으로.  
  
벽으로 지내다보니 사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해야 할 일도 없고 자고 싶을 때 맘대로 자고. 지금 내가 이 상태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벽에서 미끄러져 나왔어요. 처음에는 팔다리를 움직이는 게 낯설어 고생 좀 했어요. 지금도 벽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죽음도 그런 걸까요? 벽의 상태 같은 거. 
  
그럴지도 모르죠. 
  
열아홉번이나 죽었잖아요.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남자는 웃지 않았다. 
  
왜 비밀이에요? 
  
원래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닌데 아무도 안 믿어서 비밀이 되었어요.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자긴 방바닥이 된 적도 있다며. 방바닥이 되어보지 않고는 누구도 무덤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바닥이나 벽이 되는 거라고. 대수롭잖게 말해서 그다음부턴 얘기 안 해요.
  
지금도 벽이 되고 싶어요? 
  
잘 모르겠어요.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데 그뒤로 겨울만 다가오면 심장이 쿵쿵거려요. 다시 벽이 될까봐 두렵기도 하고 그런데 또 설레기도 하고. 혼자서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들어가려고 손과 발을 벽에 넣어보다가 부딪혀서 온통 멍이에요. 
  
벽이 되고 싶은 거네요. 
  
아뇨, 전 죽음을 연습하는 거예요. 진짜로 죽었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그렇군요.  
  
제 얘기 믿어요? 
  
반은 믿고 반은 안 믿어요. 
  
원래 그래요? 무슨 이야길 들어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요? 
  
네. 
  
놀랍네요. 내가 벽이 되었다는 얘긴 안 믿으면서. 
  
여자는 웃으면서 다시 벽을 탁탁 쳤다. 
  
외계인을 믿는 건 과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거예요. 칼 세이건이 말했잖아요. 이 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인간뿐이라면 그건 엄청난 공간 낭비라고. 
  
칼 세이건을 믿어요? 난 안 믿고? 
  
남자는 잠시 멍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칼 세이건보다는 당신을 더 믿어요. 
  
여자가 끄덕이며 웃었다. 
   
당신이 사라지면 벽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나요? 
  
네. 그거예요. 
  
당신이 죽으면 그때도? 
  
네. 
  
혹시 이제 나와 만나지 않으려고 이런 얘기하는 거예요? 
  
아직도 날 믿지 않는군요.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왜 이런 얘기해요? 
  
이제 곧 겨울이잖아요. 
  
이미 겨울인걸요. 
  
남자가 창밖을 가리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첫눈이 오네요. 올해는 겨울이 빨리 왔나봐요. 
  
저런 눈은 금방 녹아요. 첫눈은 대부분 그래요. 
  
그래도 사람들이 기억하잖아요. 올해 첫눈은 몇월 며칠에 왔다, 이런 거. 
  
대부분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잊어요. 
  
여자가 남자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할 말 있어요. 이제 죽는 역할은 그만해요. 아무리 인상적인 죽음도 소용없어요. 죽고 나면 끝이에요. 더 안 나오잖아요. 계속 나오는 역할을 해요. 난 그게 더 좋아요. 
  
벽이라도?
  
벽이라도.
  
벽 속에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나올 거라는 말이군요. 알겠어요. 당신은 벽 이제 그만 쳐요. 손에 멍 들어요. 
  
손으로 쳐서 벽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아뇨. 손만 멍 들어요. 손으로 친다고 무너질 정도로 약한 벽은 없어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멍을 살펴보았다.  
  
눈이 많이 내리네요. 함박눈이에요. 쌓이겠어요. 
  
첫눈치곤 정말 많이 오네요. 
  
올해 첫눈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겠죠. 이렇게 이르게, 이렇게 많이 오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히 남을 수도 있죠. 
  
죽을 때 눈 내리는 풍경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네. 
  
나도 보고 싶어요. 
   
  
눈은 계속 내렸다. 그해 겨울 내내 내렸는데 어떤 이는 보고 어떤 이는 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매일 눈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눈이 내리기만 하면 쓸어내고 어떤 이는 눈사람을 만들고 어떤 이는 눈 속에 누워 잠들었다. 
 


6회에 계속됩니다. 

 


강성은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가 있다. 
2015년 『더 멀리』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후 느리게 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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