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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강성은
2020년 07월 21일



계단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리아와 짧게 입 맞췄다. 
  
리아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졸린 눈으로 약간 비몽사몽인 상태였다. 내가 나가는 기척을 듣고 달려 나온 것이 틀림없다. 
  
리아의 얼굴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안쪽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리아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 오후가 될 때까지 잠을 잘 것이다. 일요일이니까. 
  
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복도를 지나 맞은편 비상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제는 정말 경이로운 하루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믿을 수 없이 벅찬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라 믿을 수 없다고 느꼈다. 
  
토요일 오랜만에 들른 선배의 가게에서 리아를 다시 만난 건 십여년간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경이로운 일 같았다. 그동안 내가 리아를 생각했던가. 가끔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리아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론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만나자마자 알게 되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했음을. 혹은 다시 사랑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벅찬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어젯밤 리아와 나의 모습들이 어른거렸다. 새벽까지 가게에서 얘기를 나누고 밖을 나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손을 잡았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게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장난스럽지도 않게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움직임을 나누었다. 
  
리아는 얼마 전 텃밭에 무와 배추를 심었다고 했다. 몇년 후엔 시골에 내려가 살 계획이라고 했다. 예전의 리아는 시골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봉사활동을 하러 내려간 섬에서 다리가 많은 벌레들 때문에 고생한 후론 캠핑이나 민박 같은 데는 절대 가지 않았는데. 리아가 맞나? 리아가 변했나? 아님 내가 알던 리아는 진짜 리아가 아니었나? 12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12년 전의 리아가 아닌 건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12년 전의 나는 아니니까. 아무렴 어떤가. 어제와 오늘 내가 아는 리아가 진짜 리아다. 
  
리아는 또 얼마 전에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그 개자식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 개자식의 전화기를 구둣발로 밟아 잘게 부숴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 개자식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카메라를 옥상에서 아래로 집어 던지고 그 개자식이 무릎 꿇고 울며 비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 개자식이 3년 동안 모은 돈으로 산 것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뛰어내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개자식이 카메라만 주우러 가면 어떡하지? 말하며 우는지 웃는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몇층이지?
  
한참을 내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층이나 내려온 거지? 리아의 집이 몇층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간 것은 아니니 기껏해야 3, 4층 정도 될 것이다. 리아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운동도 되고 좋지,라고 말하며 함께 계단을 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벽 위쪽에 난 창을 열어보려고 껑충껑충 뛰어 겨우 창을 열었다. 작은 창에 팔을 매달고 밖을 보았다. 지상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비행기 창으로 구름을 내려다 보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친구가 안개에 휩싸인 아파트 사진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고층아파트의 중간에만 안개가 끼어 있었고 고층과 저층은 안개가 없어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친구의 집은 바다가 가까운 고층아파트의 48층이었다.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고. 고층아파트는 층에 따라 날씨가 다를 수도 있다고 했다. 한번은 창문을 열었더니 안개가 밀려들어왔다고 했다. 위도 아래도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밀려들어온 안개 때문에 집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고 했다. 거짓말 같기도 했는데 창밖을 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의 집은 꽤 고층인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비상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다 보면 비상구를 찾을 수도 있을 테고 지상과도 가까워질 테니 내려가보기로 했다.  
 
몇걸음 내려가자 주위가 어두워졌다. 문득 발을 디딜 계단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낮인데도 빛이 들지 않는 걸 보니 지하로 내려온 게 분명했다. 전등이 고장 났거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창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없었다. 오직 계단만 이어져 있었다. 위나 아래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더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지하에는 몇층이나 있는 걸까. 새로 짓는 건물은 지하로 20층까지 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리아의 아파트가 그런 건물인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서 길을 잃다니 난감한 일이군. 
 
나는 다시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깊은 동굴 속에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 어서 어둠을 벗어나고 싶었다.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내가 리아의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물어보지 않았지? 리아도, 나도. 다시 만날 생각이 아니었나? 똑같은 질문을 리아에게 던진다면 리아는 뭐라고 답할까. 리아의 얼굴을 떠올리자 먼저 기억나는 것은 12년 전의 모습이었다. 좀 전에 헤어졌는데도 오늘 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부스스한 머리칼과 반쯤 감긴 눈의 희미한 느낌만 떠올랐다. 나는 슬슬 내가 한 행동들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119를 눌러봤지만 신호음이 울리지도 않았다. 통화권 밖인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내려간 것보다 더 올라간 것 같은데도 비상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미약하게나마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캄캄한 곳에 있던 데 비해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계단 위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군.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계단에 주저앉았다. 발소리는 너무 느리고 작았다. 아이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발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친 표정의 여자였다. 
 
저기, 밖으로 나가는 문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로 나가야 됩니까. 
 
내가 다급하게 묻자 그는 말했다. 
 
위에는 없어요. 
 
여자는 나를 지나쳐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어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잠시만요, 여기가 어디죠?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질문이 이상하다는 거 압니다. 그런데 들어왔던 문이 보여야 나갈 텐데 문은 보이지도 않고 제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런 일이 처음인가요? 
  
네?
  
저는 처음은 아니에요. 딴생각에 빠져 걷다보면 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오거나 둘 중 하나를 반복하게 되죠. 
  
딴생각이라. 그러고 보니 저도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계단에 서 있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걸으세요. 딴생각은 하지 말고. 
  
그런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오를 수 있나요? 이렇게 긴 계단을. 
  
생각을 하다보면 계단에 갇히게 돼요. 
  
계단에는 끝이 있잖아요.  
  
끝이 없을 수도 있어요. 
  
끝이 없다면 영원히 걸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생각을 멈추면 새로운 문이 나타난다는 뜻인가요? 
  
여자는 말이 없었다. 
  
당신은 여기 얼마나 오래 있었죠? 
  
한나절이 넘은 것 같은데 어쩌면 겨우 십분 정도일지도 몰라요. 생각을 멈추면 시간도 멈추는 것 같더군요. 계단을 벗어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생각을 멈추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도리어 계단을 늘리는 것 아닌가요.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는데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저를 아세요? 당신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함께 비상구를 찾아보는 건 어때요?
  
안 돼요. 
  
여자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려운 표정으로 벽을 짚고 뒷걸음질 쳤다. 
  
어쩌면 당신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여자는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서둘러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점점 깊은 어둠 속으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소리가 어둠에 묻히자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생각을 멈추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나는 과연 오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8회에 계속됩니다. 

 


강성은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가 있다. 
2015년 『더 멀리』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후 느리게 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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