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SHARE
1

개인주의자의 작은 고단함

위근우
2021년 02월 01일
   



 

동시대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양극단에 선 두개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보겠다. 지난해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던 소위 ‘조국 대전’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다룬 두 책이 올해 8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흔히 ‘조국 백서’로 불리는 『검찰개혁과 촛불시민: 조국 사태로 본 정치검찰과 언론』(오마이북 2020)이 전 법무부장관 조국을 옹호하고 검찰개혁의 당위를 이야기한다면, 그에 맞서 ‘조국 흑서’로 프레이밍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천년의상상 2020)는 조국 관련 논란을 포함해 현 문재인정권을 ‘586기득권정치’라는 개념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조국이라는 대상을 가운데에 둔 그들의 갈등이 아니다.
 

‘조국 백서’의 저자 중 하나인 역사학자 전우용은 책의 출간 후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공기관 강연을 앞두고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에 사인을 하라는 요청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감수성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용도로 사용된다”고까지 말했다. 공공기관 강연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다들 동의해본 적 있을 성범죄 경력 조회에 대해 그가 느낀 모욕감이란 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학교나 공공도서관 행사에서 성범죄자를 만날 수 있다는 여성들의 두려움과 같은 실체가 있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국 흑서’ 참여자인 기생충학자 서민은 개인 블로그를 통해 여성단체들이 웹툰 「복학왕」에 “여성 성기를 암시하는 묘사, 회사 상관과 성관계 후 정직원이 됐다는 스토리가 포함됐다며 여성혐오로 규정”한 것은 “번지수가 틀린 시비”이며 그것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복학왕」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찌질하게 묘사하며,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도 소위 ‘루저’의 모습으로 나온 적이 있기에 해당 장면만 집어 여성혐오로 규정하는 건 부당하다. 하지만 한국 남성들의 찌질함을 재현하는 것이 그들에게 실존적 위협을 주진 않는 것에 반해, 실제 취업과 승진에서 불평등을 겪고 때로 승진하더라도 애교나 섹스어필로 자리를 얻었을 거라는 모함을 당하는 여성들에게 해당 장면은 여성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에 가까운 표현이다.

 

정치적으로 정반대인 입장에서 책을 냈던 필진들이 여성 이슈에서는 오십보백보 수준으로 요즘 여성들 때문에 힘들다는 엄살을 피운다. 당장 서로에게 퍼붓는 말들과 그에 대한 기사들만 보면 절대 같은 하늘 아래 설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이 여성혐오라는 커다란 이불을 나눠 덮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해볼 수밖에 없다. 마치 세상을 양분한 듯한 두 입장에서도 배제된 것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논의하려는 이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혹은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흔히 당파성과 진영논리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이분법적 사고는 단순히 내 편 아니면 네 편이라는 편협한 구도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의 질문으로 세상을 반으로 갈라, 그것이 마치 세상에서 유일한 질문인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 더 문제다. 위의 경우처럼 우리는 조국 수호냐, 조국 비판이냐, 아니면 조국에 대한 제3의 입장이냐 외에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들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 네, 검찰 개혁 중요하죠. 그런데 왜 성범죄 경력 조회는 못 참겠다는 거죠? 성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법 권력이란 대체 어떤 거죠? 이렇듯 남들이 구획 지은 두세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만족하기보단, 그 선택지를 나눠놓는 기준이 온당하고 유일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나는 ‘개인주의’보다 더 나은 말을 찾지 못하겠다. 내가 속한 특정 집단의 문제의식과 정치적 입장, 혹은 내부 규칙에 자아를 의탁하지 않고 직접 세상을 관찰하고 변화하는 경험적 맥락을 살피며 스스로 질문하고 해답을 궁리하는 그러한 삶.

 

물론 개인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다. 베스트셀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문학동네 2015)에서 저자가 토로한 “이놈의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려면 견뎌야 하는 것”에 대한 “지긋지긋”함을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의 지적대로 한국사회는, 조직은 병영문화의 성격을 지니며 윤리관은 유교적 가족공동체의 인륜에 머물러 있어 개인주의자가 살기에 별로 좋지 않은 환경이다. 그러한 외부 환경을 차치하더라도 개인주의자로 사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근대가 자기 시대의 규범을 초월적 존재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내려 한 것처럼,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행동과 신념에 대한 당위를 스스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스리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 자신의 내적 모순까지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령 나는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는 사람들이 십억명에 이르는데도 수천 달러짜리 핸드백이나 구두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은 역겹다”는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공리주의적 접근이 좀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거부감이 사회적 기여보다는 플레이스테이션5를 사는 데 60만원을 쓰고 싶은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감정은 아닌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소비하든 어떻게 살든 내 일이니 너는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사이비 개인주의다. 나의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왜 나은지 스스로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거나, 내가 옳다고 믿는 모든 것을 실천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발밑의 가시처럼 인식하고는 사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다. 그러니 세상이 개인주의자를 피곤하게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는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여 문유석 판사의 말대로 많은 경우 세상은 개인주의자를 억압하지만, 사실 더 많은 경우 유혹한다. 집단에 자아를 의탁할 때, 내 행동과 판단의 당위에 대한 입증 부담을 상당히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벌어진 전공의 집단휴진 사태에 대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보라 공동대표의 인터뷰 기사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정부가 의사의 진료행위에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고, 의사들은 정부로부터 굉장히 탄압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예과 때는 본과 선배들이, 본과 때는 인턴・레지던트들이 OB모임에 와서 들려주는 식이다. (…) 그러니 의대생들은 의사 노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저수가 심지어는 원가 이하의 수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최근 한국의 진영논리는 정확히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동시대 한국 남성이 여성주의자들 때문에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남초 커뮤니티들, 중국인 입국만 통제했어도 코로나 방역은 초반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포털의 댓글들, 위에서 인용했듯 세상을 조국 옹호와 비판 두개로 나누고, 세상의 모든 이슈를 그것이 빨아들이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들. 단순히 그들을 냉소하기엔, 자신이 믿고 싶은 세상의 모습을 비춰주며 함께하자고 속삭이는 자리에 뿌리내려 그 뿌리가 서로 얽히고설킨 단단한 지반에 속하고 싶은 유혹을 거절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이 지점에서 개인주의자는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더한 귀찮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 구속되지 않는 개인으로 사는 데 너무 많은 용기와 부담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지 않는다면, 한국의 정파주의는 더 심화되고 개인주의자로 사는 건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전우용과 서민이 공유하는 여성혐오 정서를 묶어서 비판할 수 있는 건, 특별히 지적으로 날카로운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라 친 조국이나 안티 조국인 사장님 밑에서 일하지 않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또 특정 남초 커뮤니티들의 미움을 받을 말들을 했을 때 사이버 불링을 당하기도 하지만, 성평등이라는 가치에 동의하는 동료 시민들의 목소리로 용기를 얻는 덕도 크다. 정직한 개인주의자(특히 나를 포함한 중년 남성들)는 인정해야 한다. 개인주의자로 살 수 있는 건 자신이 쿨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안전망에 빚지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개인주의자로 진지하게 산다는 것은 고고하고 도도한 배가본드(vagabond)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안전망을 인식하고 또다른 개인주의자를 위한 망을 짜기 위해 날줄 혹은 씨줄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개인주의자의 도덕이다. 여타 혐오주의자에 대한 비판은 그것으로 혐오 대상이 되는 개인들을 침묵시키려는 집단주의와의 싸움이기도 하며, 노동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은 각 노동자들이 회사의 부당한 조직 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집단에 속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개인주의자가 동료 시민과의 연대 속에서 느슨한 소속감을 느끼는 역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조금 귀찮고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별로 외롭진 않다. 혹시라도 그렇게 느끼는 이가 있다면, 내가 함께하겠다.



 


 



남는 질문들

 

3 시의성 있는 주제에 대한 솔직한 글을 흥미롭게 읽었다. 개인주의자로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느슨하지만 필연적인 소속감’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생각을 듣고 싶다.

위근우 거리에 대한 감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남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나는 기혼자인데 나와 아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회적 통념의 압박을 견디거나 밀어낼 수 있는 힘과 논리가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거리의 유지다. 관조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며 때로는 투쟁적이다. 최근의 낙태죄 폐지 담론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국가 권력 및 가부장제 담론과 싸우며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이슈에 일일이 반응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 거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개인으로서 달성하기 쉽지 않은 협업적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최소한의 연결감과 동료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반대로 그 협업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투신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사체의 강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개인이기 위해 힘을 합친 이들의 연대로서 최소한의 느슨함과 거리감이 요구된다고 본다.
 
3 오히려 진영논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이야말로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로 설정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어떻게 전유해야 할까. 여기서 ‘개인’이란 ‘개인주의자’의 ‘개인’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위근우 아마도 질문에서 의도한 개인주의자란 진영의 강령을 내면화하고 우리가 옳다고 믿기에 이것은 옳다는 식의 집단적 주관주의를 개인주의로 칭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경우 ‘나’와 ‘우리’는 구분되지 않으며 ‘우리’가 공유하는 어떤 에토스가 ‘나’의 옳음을 보증해준다. 이 경우 그들의 에토스는 대부분 조악한 형태의 윤리적 주관주의로 소급한다. 나와 우리가 이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니 이것은 잘못됐다는 일종의 순환논법인데, 이는 ‘일베’ 같은 극단적 커뮤니티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개인주의를 자신을 중심에 놓는 태도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주의’ 또는 ‘-주의자’라 할 때, 그것은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것이며, 그 방식이 세계 안에서 허용 가능한 이유에 대해 나름의 이념적 근거를 마련하는 노력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원고에서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행동과 신념에 대한 당위를 스스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란 니체적이기보다는 칸트적인 의미에서 보편적 자기입법을 시도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의 내면성이라는 진공 상태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입법적 논거에 대한 반박을 가정하고 그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본인의 주관적 감정에 의존하는 윤리적 주관주의로서의 개인주의가 아닌 상호 주관적 관점을 지닌 개인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즉 개인주의에서의 개인이란 유아론적 주체가 아닌, 이인칭 대상을 미리 전제하는 상호 소통적 주체로서의 개인일 것이다.

3 개인주의자의 요건으로 여러 안전망의 선행을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안전망과 집단이 제공하는 안정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위근우 미리 전제하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개인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개인으로 두려움과 어려움 없이 살기 위해선 상호간 호혜성에 대한 상당히 강한 합의와 신뢰가 필요하다. 그런 규범에 대해 느끼는 안전한 감각 그리고 타인에게도 그 감각을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내가 생각하는 소속감이다. 그 소속감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안전망이 되어주는 동시에 또한 경제적, 구조적 안전망에 대한 설계를 함께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글에서 부정적인 맥락으로 이야기한 정파적 소속감은 오히려 앞서 이야기한 넓은 의미의 소속감을 해체한다. 집단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 우리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드는 것과, 우리가 우리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지키기 위해 규범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후자의 경우 어떤 종류의 대의를 내걸든 기본적으로 ‘우리’라는 개념으로 ‘너희’를 배제하기 위해 자의적 규범을 설정한다. 실례로, 나는 모 남초 커뮤니티에서 안티 백서와 남성 페미니스트가 동급 취급받는 것을 보았다. 안티 백서는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서로 지켜주자는 시민사회의 상호 신뢰를 상당 부분 훼손하는 이들이다. 나는 공동체적 소속감으로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남성 페미니스트도 안티 백서 같은 존재일까. 동료 시민으로서의 여성이 성별 불평등 없이 개인으로서 누릴 권리를 온전히 누려야 한다고 믿고 말하는 사람이 공동체의 적이긴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 커뮤니티에선 남성 페미니스트 역시 자신들의 적이자 안티 백서 같은 사회악이다. 여기서 그들의 배제는 규범적 근거를 갖기보단, 반대로 배제를 위해 규범을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에 가깝다. 아마 그 안에서 집단 내 동일성을 서로 확인하고 자신들의 적을 미워하며 안정감을 느낄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안티 페미니즘적 성향은 평등에 대한 공동체의 합의를 훼손하고 있다. 그 차이다.
 


위근우
대중문화 전문 기자.
『매거진 t』와 『텐아시아』를 거쳐 웹매거진 『아이즈』에서 취재팀장으로 재직하다 현재는 비정규 마감 노동자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웹툰의 시대』 『프로불편러의 일기』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가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