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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는 멸균실에서 나오지 않는다―2020년 가을의 독서 노트

김미정
2021년 02월 10일
    



 


한세기 전 전차 안

 

서울지하철 2호선과 비슷한 것이 도쿄의 야마노테선이라고 한다. 이 순환 전차 안에서 젊은 여성 승객들을 대상으로 미적 감식안을 발휘하는 한 남자와 그의 시선을 좇아 전개되는 소설이 있다. 설정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할 이 소설은, 동아시아에서 근대소설이 막 전개되기 시작하던 즈음 탐미주의의 계보에 어엿이 놓이기도 했다.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단편소설 「소녀병(少女病)」(1907)1은 3인칭 시점을 취하면서도, 주인공 스기다 고조의 관점에서 서사가 전개되며 그의 고뇌에 밀착한다. 스기다는 소설을 쓰며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 오랫동안 젊은 여성들을 동경하여 병이 날 지경인 그는, 전차로 오가는 길에 같은 칸에 탄 여성들에 대한 망상을 하며 자신의 젊음이 쇠락한 것을 한탄한다. 내내 스기다의 시선과 관념을 좇던 소설은, 망상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그가 선로로 추락하며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좌절이 예고되었던 이 중년남자의 판타지에서, 근대소설의 시점(시선의 힘·권력)이나 탐미주의에 내재된 젠더, 섹슈얼리티 문제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궁금한 것은, 이 남자의 집요한 페티시의 맥락이나 문학사의 첫 장면이 상징하는 근대소설의 정신구조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전차 안 여성들의 이야기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선의 내러티브 속에서 여성들은 침묵하는 존재가 되어 스기다의 내면과 고뇌를 위한 피사체 혹은 풍경으로 배치된다. 청춘예찬과 고뇌가 특권화되는 장소에는 왜 늘 특정한 젠더의 매개자가 필요했나. 그녀들은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녀들에게 전차란 어떤 공간이었으며, 그녀들이 본 전차 안과 밖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자들의 공포와 그 행방

 

이 피사체들의 이야기를 2020년 가을, 한 웹진에서 읽게 되었다. 단번에 한세기 전 「소녀병」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 이미상의 단편소설 「여자가 지하철 할 때」2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간단히 말해 이 소설은 지하철 안에서 승객의 위험도를 체크하는 망상과 그 기원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말을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이탈시켜 낯설게 접속시키는 방법을 취하는 이 소설은 첫 대목부터 얼굴의 분열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러개의 얼굴이란 일종의 생존의 가면이며, 구체적 이유와 물질성을 가진 분열의 결과이다. 분열이나 편집증 없이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여성으로 살아올 수 있었겠느냐는 서사적 항변도 설득력을 가진다. 스타일이 곧 주제이자 소설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였다고도 생각한다.

 

「소녀병」이 단적으로 상징한 이래, 2016년 강남역 포스트잇과 해시태그에 이르기까지 누적되어왔을 여성들의 “지층적 두려움”이 「여자가 지하철 할 때」에서만큼 신랄하게 펼쳐진 작품을 자주 접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주인공의 과장된 공포는 맥락 없는 망상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호소하고 있는 의식적·무의식적 불안과 두려움의 일면이다. 가령 2020년 n번방 성착취 범죄 사건은, 남성들에 의한 대규모 성폭력과 성착취가 돈과 기술을 매개로 카르텔을 형성하며 산업화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본다’라고 하는 근대의 시각 특권적 행위가 어떤 역학을 내포하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케 했다. 그리고 ‘보는’ 것이 ‘하는’ 것과 또다른 의미의 ‘행위’라는 것을 상기시켰으며, 그렇기에 ‘보는 행위’ 역시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비로소 상징적으로 환기했다.

 

간단히 말해 「여자가 지하철 할 때」는 2016년 이래로 표면화한 오늘날 여성의 지배적 정동을 서사화한 소설이다. ‘지하철 하다’라는 조어, 하차한 주인공이 “살았다!”라고 외치는 장면 등은 여성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행위조차 죽음을 무릅쓸 정도의 일임을 암시한다. 
 

한편 소설에서 액자 안의 이야기 혹은 알레고리처럼 제시되는 ‘안평대전’ 에피소드가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만들었다. 안평대전 에피소드는 2016년 강남역 사건 이래로 전개되어온 여성의 정동과 그 복잡한 행방을 상기시키는데, 이 소설의 공포와 사투의 서사와 한층 더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안평대전은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라는 문구로 상징되는 ‘평등파(평파)’와, 그 문구를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안전파(안파)’의 대립을 일컫는 말이다. 이 설정만으로도 2016년의 맥락뿐 아니라, ‘한국 여성 대(對) 난민 남성’ 혹은 ‘생물학적 여성 대 트랜스젠더 여성’ 식의 최근 한국사회가 경험해온 여성 안의 분리주의 노선들과 그에 관련된 대립들까지 떠오르게 한다. 서술자가 재현하는 일견 도식적 상황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주인공 행동의 맥락을 구성하고 소설의 세계관과 스타일 형성 과정까지도 암시한다.

 

 

환대는 멸균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지하철 할 때」는 여성이 안전과 자기보존을 강박하게 되는 오늘날의 폐색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 수진의 ‘자부심’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자부심은 다수가 회피하는 돌봄, 살핌, 환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다. 돌봄, 살핌, 환대는 자본주의-가부장제의 구조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데 필수적이면서도 그동안 폄하되어온 재생산노동, 감정노동이다. “모든 이를 환영”한다는 평등파조차도 돌봄, 살핌, 환대를 기피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떠밀려 그 역할을 “독박”쓴다.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실제 평등의 의미가 어떠한 교환의 감각 속에서 무력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수진은 이방인을 돌보고 환대하는 역할을 자처하는데, 이것은 그녀의 선함이나 도덕성과 무관하게 그려진다. 잠시 다음 인용을 본다.

 

“누구든 어미 새가 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손을 가볍게 털고 입을 푼다. 들숨에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날숨에 자신을 상대에 포갠다. 이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상상하고 바로 그 말을 할 수 있도록 정교히 고안된 질문을 던진다. 아기 새는 신나서 쫑알댄다. 어미 새는 대시보드의 개처럼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러니까 이 끔찍이 쉬운 일을 수진이 전담하게 된 데에는 수진의 의지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수진은 할 수밖에 없었다. 면제가 수진에게 그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인용의 앞부분에 따르면 다수가 회피하는 이 돌봄의 역할은 어렵지 않다. 묘사도 직관적이다. “들숨에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날숨에 자신을 상대에 포갠다.” 존재는 배타적으로 구획되지 않는다는 사실, 타인과 내가 서로에게 반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어떤 수행적 공생에 대해서 이 대목은 공들여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서술이 진행될수록 이것은 익숙한 그 타자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환대’라는 말을 둘러싼 독자로서의 기대는 인용 끄트머리의 “면제”라는 말에 의해 중지된다. 서술자는 수진에 대한 독자의 감정적 이입도 차단시키는 듯하다. 이어서 수진의 환대가 면제 때문이라는 사정이 밝혀진다. 수진이 속한 모임은, 중위소득 오십 퍼센트 이하의 사람들에게 회비와 뒤풀이비를 면제해주는 내규를 가지고 있었다.

 

“돈빵이 몸빵보다, 몸빵이 마음빵보다 낫다.” 이 공동체에서는 돈 > 몸 > 마음 순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수가 회피하는 감정노동의 자리는 늘 누군가에게 전가된다. 계속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나는 처지 노동 중이야. 존재 노동 중이야. 내 덕에 저 사람들, 단차를 느낄 수 있어. 베풀 수 있어. 언제나 베푸는 쪽 기분이 나은 법이지. 베풂당하는 쪽보다. 나는 절대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 그러나 감사는 감정이고,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꾸 고마워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마움은, 염치는 때로 사람에게 가장 헐하고 험한 일을 시킨다.”

 

소설이 주제화하는 것은 여성의 “지층적 두려움”3만이 아니다. 방금 전 서술은 얼핏 환대조차 상호성에 기반한 교환(기브 앤드 테이크)에 불과하다고 냉소하는 것 같다. 비유로 놓인 에피소드이기에 독자의 스키마가 힘을 갖기 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조심스레 소설 바깥에서 평등과 정의를 둘러싸고 빈번해진 갈등 혹은 소수자·약자 내부의 혐오와 배제 등의 장면부터, 성급하게는 상호부조의 여러 형태와 지원 네트워크가 냉소되거나 파괴된 세계라든지, 그것을 내면화·신체화하는 오늘날 주체 형성의 회로까지도 떠올려보게 된다.

 

하지만 인용대목을 다시 찬찬히 짚어본다. 이 대목은 받은 만큼 정확히 돌려줘야 한다거나, 단일한 척도(화폐)로서 가치를 셈해야 한다는 세계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돌봄, 살핌, 환대 등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절하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 역할들이 누군가에게 고유하게 할당된 것이 아님을 강변한다. 수진에 따르자면, 돌봄과 환대의 역할은 이 세계를 저변에서 가능케 해온 최저의 보루로, 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진이 자처하는 환대는 어떤 강요나 내면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은 수행적으로 선택되고 있다. 환대를 도덕이나 신념으로부터 탈구시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평등이 점점 무기력한 이념이 되고 계속해서 어떤 격차가 만들어지는 오늘날 세계의 구조도 간파하고 있다. 그렇기에 앞의 인용에서 냉소를 완전히 지우기는 어렵다 해도, “자꾸 고마워져버리는” 것이라며 투항하는 주인공의 선택은 각별히 읽어야 한다. 그녀의 환대는 멸균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안전파’와 ‘평등파’ 사이에서, 그리고 ‘고마워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고마워져버리는’ 감정·정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돌봄과 환대의 역할은 그녀가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어서, 생물학적 여성이어서, 혹은 회비를 면제받는 소득하위계층이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고마워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어도 언제나 “고마워져버리는” 감정은 ‘생겨버리는’ 것이다. 냉소를 작정해도 나를 무너뜨리는 상황은 오고야 마는 것이다. 화폐가 척도로 놓인 교환의 심상구조가 아무리 압도적이어도 그것에 온전히 포획되지 않는 감정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디에 서 있는가: 정체성과 소유의 존재론을 넘어서

 

강조컨대 주인공의 돌봄과 환대는 차이나 적대를 상상치 않는 멸균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개인적 도덕성, 개인적 성향안에 있는 나 자신이 어떤 태도를 정립해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처음부터 타자의 삶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이미 사회적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언제나 구성적 사회성을 상정하면서 행동이나 반성을 시작할 수 있다”4라는 말을 지금 떠올리는 것도 생경한 일은 아닐 것이다.

 

즉 ‘환대’는 어쩌면 오늘날의 복잡함을 환기하는 여러 장면을 거쳐 선택에 이르는 주인공의 지난함과 용기로부터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주인공-서술자가 보여주는 것은 우선, 안전한 공간에의 권리를 담보받지 못해온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여성’은 균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안의 차이들은, 예컨대 회비를 낼 수 있는 조건의 여성과 낼 수 없는 여성, 생물학적 본질로서의 성별을 최종심급으로 삼는 여성과 아닌 여성, 안전을 위해 또다른 약자를 배제하는 여성과 아닌 여성, 모두의 평등과 환대를 지향하지만 실제 그 역할은 미루는 여성과 그것을 자처하는 여성 같은 식으로 나뉘면서 배제나 적대로 가시화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된 ‘여성’은 누구일까. 소설의 의도와 불일치할 독해 역시 독자가 향유할 자유일 터이니 과감히 말해보자면, 법적으로 지정된 성별이 상정할 생물학적 여성도, 폄하된 환대와 돌봄(재생산노동)의 역할을 할당받고 내면화해온 여성도, 안전이라는 이데올로기하에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여성도, 여성끼리라면 무엇이든 공감할 수 있다는 사고로 지지되는 여성도, 모두 이 소설이 말하는 여성은 아닐 것이다. “말을 믿지 말지어다. 오로지 ‘착석 위치’만 믿을 것!”이라는 문장의 ‘말’의 자리에 ‘여성’을 넣어 다시 읽어본다. ‘자리·위치’에 대한 존재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재현·페미니즘·팔레스타인 문학 연구자 오카 마리(岡眞理)는 ‘위치성’(positionality)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것을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공간적 배치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5 발화나 행동은, 그가 '소유한' 속성이라고 여겨지는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공회전할 때 그것은 배타적 자기동일성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질문은 ‘어디에 서 있는가’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소위 약자성이라는 것 역시 종종 누군가의 본질처럼 간주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존재들 사이에서 복잡하게 연루되는 요소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약자성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왜 그렇게 놓이는지 숙고 후 연결되어야 할 일종의 연대의 대상이다.

 

즉 어떤 사안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사유나 입장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정체성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속성들을 개념화한 말이다.6 정체성이 소유격(‘~의’) 문장구조에 의해 서술된다는 것도 잠시 적어둔다.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안전에 대한 문제가 오갈 때 그것이 정체성의 지표들(성, 장애, 계급, 인종, 연령, 지역 등)만으로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을까. 어떤 존재를 이러한 개념(표상)으로 상상할 때, 나노초(秒) 단위로 변화하고 있을 존재와 세계의 ‘포착할 수 없는 순간’들은 잊히기 쉽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역시 유동하고 있다. 세계는 내가 가졌다고 여겨지는 속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며 현실은 결코 간명하게 프레이밍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복잡한 요소들의 관계 속에서 계속 유동한다. ‘나’는 특정 정체성으로 구획된 채 이 세계와 함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자체가 관계이고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형상을 갖추게 된다. 심지어 서 있는 자리를 초과해서 생겨버리는, 개념적 설명이 어려운 그 상황의 어떤 정동도 결정적으로 나를 변용시킨다. 개념과 사유를 달리한다면 오늘날 여러 곤경이나 새로운 문제틀 앞에서 다르게 말할 것들이 생길 것이다.

 

 

빛나는 자부심

 

그러고 보니 정작 이 소설의 가장 소중한 대목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인용이다. “언젠가, 누군가, 아마도 경찰이 수진에게 왜 사무실에 혼자 있었느냐고 물으면 수진은 말할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평등의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요.’ 그 말을 하는 수진은 비참하지 않다. 헐겁게 비아냥대는 것도 아니다. 그 순간 그녀는 자부심으로 빛난다. (어쨌든 수진도 한때는 평파였던 것이다. 또한 어느 시기, 어느 무리에서 그녀는 평대다.)”7 
 

지금 마지막 문장에서 읽게 되는 것은 ‘여자’를 배타적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 말의 의미들에 대해 이 소설은 내내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괄호 안에 갇혀 선명하게 가시화하지 않은 채 잠재태로 처리되고 있다. 게다가 분명히 감지되는 의지에도, 소설은 “살았다!”라는 안도의 탄성으로 마무리된다. 수진의 분열만큼 실은 이 소설 역시 분열적이다. 그러나 분열 자체가 취약점은 아니다. 아니 취약점(취약함)이라고 해서 부정될 이유도 없다. 그 불안정함과 취약함 자체가 우리 실존의 조건이지만, 그 조건으로 인해 우리는 다시 서로를 돌보게 된다. 회비도 설거지도 면제받은 수진이 모두가 기피하던 환대를 자처한 것은, 이해타산과 교환의 감각 때문이 아니다. 그녀 스스로 자기 위치를 명료하게 자각하는 어떤 다짐을 한다고 해도, 그럼에도 고마운 마음은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한세기 전 「소녀병」 속 주체와 대상 관계가 오늘날 전방위적으로 질문되는 상황들이 단적으로 암시하듯, ‘지층적 두려움’은 생물학적 여성을 둘러싼 어떤 구조가 구축되고 공고해지면서 마치 생물학적 여성이 본질인양 실정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누적된 역사성은 계속 ‘여성’이라는 말과 실존을 분열케 한다. 예컨대 「소녀병」의 스기다에게는 지하철에서의 공포와 사투를 설득해야 하고, ‘안평대전’의 당사자들에게는 위치성과 환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 ‘여성’이라는 말을 둘러싼 분열의 조건과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소위 여성 안의 배제, 혐오, 분열까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갈 수 없는 이유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미더운 것은, 이 분열을 통과하면서도 환대의 행위가 ‘빛나는 자부심’이라는 사실을 또박또박 전달하는 대목이다. 돌보고 살피는 일을 평가절하시켜서 젠더화해온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가령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의 문제)까지 이 소설이 질문하지는 않는다. 발화 위치의 정치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사화했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세계를 다시 상상할 수 있을지 성큼 발걸음을 내딛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적어도, 여성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동시에 어긋나버리는 자리를 보여주고, 거기에서 다시 ‘여성’을 도모할 이유와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와 관계를 상상케 하는 이름으로, 지금 ‘여성’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인용 속 괄호가 지워졌을 때, 소설뿐 아니라 이 소설의 나-우리의 세계 역시 한번 더 도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다야마 가타이 외 『일본 단편소설 걸작선』, 오석륜 옮김, 행복한책읽기 2020.
   다야마 가타이는 이른바 최초의 사소설(私小說) 「이불(蒲団)」의 작가이고, 「소녀병」은 「이불」과 같은 해인 1907년에 발표되었다.
2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 문장 웹진2 020년 9월.
3 임의로 인용하였으나, 소설에서 이 말의 위치(이것은 안파 남자의 발언이다. 그리고 평파 여자는 “여자 박스”에 넣지 말라며 그를 구박한다)에 따르자면 이 두려움이 곧 소설의 주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4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2 016.
5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6 크로포드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홉스에서 로크까지』,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제언』, 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김건형 「2020, 퀴어 역학: 曆學·力學·譯學을 위한 설계 노트 1」,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김미정 「‘소유’를 질문한다: 문학과 커먼즈(1)」, 웹진 문화 다 2019년 8월.
7 그런데 “푹 찌르기만을 잘 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그런 어미 새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분열적인 수진의 ‘생각하는 창’들은 그런 어미 새의 윤리를 환기하는 구멍과도 같이 작은 창으로 수렴되었다가 분산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우찬제 「‘이 계절의 소설 2020년 겨울’ 선정의 말」(moonji.com/monthlynovel/25970/) 같은 평론의 말은, 생물학적 여성의 구획을 다시 소환하고 그것에 특정 가치들을 부여해온 역사까지 환기시키기 때문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만 말하면, 환대의 의미는 ‘남성-호전적-폭력-가해-능동’ 대(對) ‘여성-평화적-희생-피해-수동’의 이미지 박스 안에 갇혀버린다. 소설은 이러한 ‘여자 박스’를 분명히 거부했다. 그 거부하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의미가 재생산되는 결과는 아무래도 아이러니한 것이다.


 
 



남는 질문들

 

3 “주인공의 돌봄과 환대는 차이나 적대를 상상치 않는 멸균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에서 ‘멸균실’이라는 은유가 독특하게 다가온다. 이 글의 요지가 담긴 주요한 메타포로도 읽히는데, 차이나 적대를 상상하지 않는 상황을 오염의 정도와 연결시켜 ‘멸균실’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이유가 궁금하다.

김미정 모든 존재는 공통적인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지만 결코 차이를 무시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공통적인 것’과 ‘차이’는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립들은 종종 그 둘을 배제하는 것 같다. 자신의 옳음이나 믿음이 확증편향적으로 구축되면서 차이는 자주 배제된다. 그 배제는 배척, 혐오, 폭력으로 나아가곤 한다. 그런데 A와 B는 공통적인 것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설에서도 서로 평행선만 그리던 평등파 여자와 안전파 여자는 담배 피우는 시간이면 잠시 의기투합한다. 또 한편 공통적인 것으로 가득 찬 ‘같은 쪽’이라고 해도 모두가 동일하고 균질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차이와 공통적인 것을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설마 평화를 사랑합시다, 적대하지 맙시다, 균형을 맞춥시다 하는 이야기로 전달될리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자기(‘나’든 공동체든)의 옳음을 표현, 설득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타자를 세워두고 그를 치는 것이다. 혹은 프레임을 만들어놓고 타자를 구부러뜨리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오늘날 단순한 배제, 혐오, 적대가 아닌 유독 손쉬운 방법론처럼 사용되는 듯하다. 돌봄이나 환대 역시, 적과 타자가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힘들다”(스피노자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라는 말에 값하는, 일종의 도약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환대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전제이자 의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떤 용기와 감행이 필요하기도 하다.
‘멸균실’ 비유는 오늘날 배제, 혐오, 적대를 동력으로 삼는 이들뿐 아니라, 그것을 우려하며 이 세계의 다른 관계성을 고민하고 있는 모든 이들과도 공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3 “정체성”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근거한 개념”이라는 말과 함께 해당 문제를 다룬 논의들을 남겨주었다. 각각의 논의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줄 수 있을까.
 
김미정 간단한 소개는 어렵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몇자 적어본다. 글에서도 내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정체성이 너무도 당연한 말로 통용되고 있으니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존재를 상상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정체성은 어원적으로 ‘소유’(property) ‘개인’(individual) 등과 불가분의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개념어가 근대초기 서구로부터 일본을 경유해서 번역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소유’는 배타적 지배, 점유를 의미하는 dominium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은 individual이라는 말의 어원처럼 ‘더이상 나뉘지 않는다’는 의미다.
즉 지금(근대)세계를 디자인해온 말의 하나가 ‘정체성’이라고 할 때 ‘소유’나 ‘개인’이라는 말은 근대자본주의의 가치와 불가분인 것이었다.

3 「여자가 지하철 할 때」의 인물과 같이 ‘나’의 취약성과 연결성을 성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만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위치성을 경유하는 질문을 하면서도 ‘배타적 자기동일성’에 함몰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자의 위치에 있는 이에게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어떤 성찰을 유발할 수 있을까.
 
김미정 사실 늘 멈칫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강자의 위치에 있는 이”에게 어떤 성찰을 요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다. 즉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로 질문을 바꾸더라도 그런 성찰을 쉽게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매우 공감한다. 뾰족한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간단하게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선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환대를 택한 것은 아니다.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꾸 그 위치에 할당된 역할을 벗어나려 했던 것인데, 상황을 경유하면서 ‘고마워져버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국에서도 내내 정체성을 넘어서, 교차성, 위치성 등에 대한 고민이 많다. 예를 들어 정체성이 오해되거나, 집단 내부의 차이를 볼 수 없게 하거나, 약자성을 충분히 숙고할 수 없게 한다는 이유에서 ‘교차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실 교차성 역시
정체성을 기본 단위로 하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성이 지닌 한계까지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았나 싶다. 한편 위치성은, 정체성 대신 사유하자는 의도에서 이야기되었지만, 지금 한국에서의 위치성 고민 역시 기본 단위를 정체성으로 상정하는 사고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측면이 조금 엿보였고 나 역시 자주 그렇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주인공이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환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위치에 대한 자각이나 의지와 별도로 감정·정동이 그녀를 휘감고 변용시켜버렸다는 점이었다. ‘고마워져버린다’는 중동태(中動態)적 구절이 그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이 소설은 재현이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이 세계의 어떤 원리까지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의 사유나 행동이 늘 어떤 의도치 않은, 예상치 못한 마주침 속에서 변용되는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무(無)주체, 탈(脫)주체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주체가 되어간다는 이야기이고,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늘 좋음(살림)의 힘과 접속하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정동(신체, 변용)의 문제도 결정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소설 속 주인공도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 때문이라기보다 어떤 마주침들 속에서 수행적으로 환대자가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과 사유를 달리할 때 이 세계도 다르게 설정되고 전개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확실히 강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이 주인공과 같은 성찰을 하기 어렵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그것이 옳은 이야기라고 해도, 듣고 싶지 않으면 안 듣는다. 이것은 사람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듣고 싶지 않으면 듣지 않아도 된다는 (기술적, 제도적, 감각적) 회로가 갖춰져 있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말(개념)은, 저 밑바닥으로부터 세계의 흐름을 결정한다고 생각해왔다. 말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은, 세계를 디자인하는 기초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의 생각, 행동의 어떤 회로를 만드는 것과 아주 많이 관련된다. 사소한 조사 하나, 개념 하나를 어떻게 사용, 공유하느냐에 따라 세계의 방향이 달라지는 사례라면 셀 수 없을 것 같다.
즉 강자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자기질문과 성찰을 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이 세계의 근간에 먼저 성찰과 감각의 회로가 갖추어져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직접 관련될 것 같다. 그 회로를 만드는 것과 말, 문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김미정
문학평론가, 〔문학3〕 기획위원.
지은 책으로 『움직이는 별자리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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