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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치, 우리의 장소

문학3
2021년 02월 10일
      



  

대체로 우리는 ‘개인화 사회(individualized society)’라는 명제에 대해 그다지 이견을 갖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공동체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추동되는 욕망에 따라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개인은 가족이나 국가 혹은 고향 등의 소속 집단을 위해 살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존재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지역공동체 등의 영향이 이전 시대와 비교해 매우 약해졌음을 실감하고 있다면, 이의를 제기하기 쉽지 않은 명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우리에게 어떤 착시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마치 현대인의 삶이란 극도로 단자화된 것이며, 모두가 부유하는 섬처럼 살아갈 뿐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실존과 자기정체성이 개인적인 것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일 터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가족이나 지역공동체를 대체하는 새로운 준거 집단이 개인의 삶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새로운 정체성 집단 간의 갈등이 매우 극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한편 정체성이라는 것은 중층적이고 복잡한 맥락에서 형성됩니다. 한 개인을 이루는 요소는 국적, 젠더, 계급, 신체적 조건, 문화적 배경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그 여러 층위의 교차를 통해 한명의 개인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명의 개인은 이처럼 교차하는 여러 정체성 가운데 임의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그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지역공동체와 같은 생래적 요소에서 자기정체감을 추수하는 것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생래적 요소가 아닌 데서 자기정체감을 획득하는 것은 대체 어떤 경로로 가능해질까요? 
 

〔문학3〕 13호 주목의 키워드가 ‘나의 위치, 우리의 장소’인 것은 한명의 개인이 ‘나’라는 중층적 존재의 위치를 임의적으로 선택 또는 변경함으로써 임시적인 ‘우리’를 구성하는 방식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또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자신을 위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라는 것이 유동적으로 변모한다는 데서 이번 호의 문제의식은 출발했습니다.
 

연구자 남수정의 「일상의 정치」는 연구프로젝트그룹 ‘서울퀴어콜렉티브’가 종로3가라는 공간이 종과 횡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교차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라는 데 주목하여 탐구한 내용을 전하며 하나의 공간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정체성들이 어떻게 상호배제되어왔는지 살피고, 그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낯섦이 새로운 정치성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을 환기하였고, 연구자 송유진은 「여대라는 장소와 여성이라는 정체성—여대는 페미니즘의 요새가 될 수 있을까?」를 통해 정체성 정치가 만나는 공간으로서의 ‘여대’를 중심으로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거부 사건’의 의미를 되짚으며 공간과 정체성에 대한 폐쇄적 상상이 정치와 삶의 역동적 재구성을 차단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문학평론가 김미정의 「환대는 멸균실에서 나오지 않는다—2020년 가을의 독서노트」는 이미상의 소설을 살피며 안전이 위협받는 세계에서의 환대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그 과정에서 정체성이 아닌 위치성의 사유를 통해 여성의 이름과 ‘나-우리’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한편 김승일 시인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타나는 폐쇄적 균일화를 지적하고, 그 안에서 구성된 정체성과 정치성의 공허함에 대해 논하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배타적 폐쇄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안전한 공간을 만들 것을 요청합니다. 이어 칼럼니스트 위근우의 글은 이처럼 서로에게 배타적이며 적대적인 여러 집단 사이에서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록노동자 희정의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 기록」은 기록 대상자와 오랜 세월 맺어온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상호이해 불가능과 그 불가능을 뛰어넘는 타자와의 만남의 가능을 짚어봅니다. 
 

이번 호의 주목은 특정 위치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자기정체성의 문제를 심도 있게 살피며, ‘우리’의 장소란 그리고 ‘우리’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나’의 위치를 새롭게 상상하고 확장해나가며, 타자와 적극적으로 만날 때 ‘우리’는 이전보다 나은 자리에 위치할 것입니다. 이번 호의 주목에 실린 글들이 새로운 상상의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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