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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한 물의 기운

윤혜지
2021년 06월 02일
                 



 
빈티지한 물의 기운


 
공장에서 물을 받아왔다
 
골짜기 약수 길어 
찍어낸다던 그 물 
 
마시고 아빠는
 
업라이트 피아노
가족사진
 
장만했다
 
주말마다 둥글게 앉아
대하드라마를 보며 치킨을 먹었다 
 
딸 딸 아들이 나눠 먹은 
가슴 다리 목
  
머리 어깨 무릎은 없다
슬하는 벗어난 지 오래 
 
세계문학전집 속 소녀라면 검은 빵을 먹어야 했다
먹고 남겨서 목탄으로 그은 선을 지울 수도 있는
 
깨끗하게 검고 단단한 
 
박공지붕은 책을 엎어놓은 모양을 닮았다 
 
뉴스까지 말끔히 보고  
이번 세기 최고의 우주 쇼를 보고 싶어  
동생들을 지붕 위에 세워두었다
 
쇼가 시작되면 깨워줘
말하며 지붕 아래 깃들어 잠들었다 
 
읽던 책을 엎어두었어야 했는데
 
손톱이 희게 될 때까지 
순하게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단단하게 언 무릎 네개  
 
밤새 지붕 위에 서 있던 동생 하나가 말했다
 
누나야 우리 별 봤다 별이 무거운 것부터 하나씩 떨어졌다 나중엔 걷잡을 수 없더라  
 
거짓말이다, 언니야 
다른 동생이 이어 말했다 별은커녕 빛 하나 없었다 대신 흰 비둘기를 봤다 우리 집 지붕 위 희다 못해 창백한 비둘기들 가득 앉아 부리를 서로의 날개 밑에 파묻고 있었다 그것은 성령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다만 그것들이 울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비둘기와 동생들 
울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한 동생은 그날부터 울기만 했고 나머지 동생은 힘을 키웠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새까맣게 모여 있던 흰 비둘기 가족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은 아빠의 자랑이었는데 
 
동생들은 무럭무럭 자라  
빈티지 와인 마시는 주인 밑에서 일한다
 
부지런히 일하고 먹고 마시고 가끔 같은 방향으로 돌아앉아 울기도 한다
뺨은 사랑으로 홀쭉해져 비스듬한 눈물 자국 켜켜이  
  
각자의 지붕을 지어 그 아래 깃들어 살지만 이제 아무도 지붕 위에 올라설 엄두를 내지 않는다 
 
지붕은 비어 있다
 
간혹 새까맣게 성령 
스쳐가도 알 수 없다      



 
* 이석 노래 「비둘기집」 중에서.

 
 


윤혜지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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