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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대의 비평 (1)

소영현
2017년 02월 08일

문단–(비평)–문학



 

어떤 분야건 학문의 발달은 비교적 비의적인 용어법의 발전과 정교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문학비평가는, 전문적이든 비전문적이든
가능한 많은 독자들이 공통적 문학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사고와 저술 양식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또는, 최소한 가끔이라도 그런 양식으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Paul Hernadi

 

 

 

1 세계의 주름

 

문학은 주름이 된 세계이다. 접힘면의 갈피에 세계가 새겨져 있기에, 주름이 된 접힌 주름면을 다시 펼쳐내는 일은 문학을 통해 세계를 다시 읽는 일이다. 그 일을 종종 비평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문학은, 비평은, 세계와 만나는 한 길이다. 그러나 문학이 세계의 주름이라 말하려면, 문학이 텍스트화된 현실이며 비평이 텍스트를 통한 현실 읽기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서가 덧붙어야 하는 시절이다. 우선 이런 이해 자체가 가능하지 않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아마도 문학이 더이상 세계의 주름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근본적 의구심이 가장 먼저 제기될 것이다. 연이어 ‘나’의 문학과 ‘너’의 문학, 그리고 ‘우리’의 문학이 같은지, 아니 각기 다른 ‘문학들’ 사이에 공유점이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제기될 것이다.
 

문학이 세계의 주름이 아니라면 주름을 펼쳐 갈피에 새겨진 무언가를 읽어내는 일인 비평에 대해서는 유용성의 여부를 따질 필요조차 없게 된다. 하지만 세계의 주름인 문학이 특정한 얼굴로 고정되어 있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유력한 문학형식은 우리의 상상보다 짧은 역사를 갖는다. 지배자를 위한 문학이 시대적 형식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런 문학 형식의 소실이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설이 유력한 문학형식으로 등장한 것도 불과 몇백년 전이다. 인류의 역사, 아니 문학 자체의 역사에 비추어 개별 장르들, 다양한 시대정신의 구현체들의 역사는 보잘 것 없는 것에 가깝다. 거시적이고 미시적 차원에서 문학의 시대 형식에 끊임없는 변화가 있었으나, 계층과 인종, 지역과 젠더를 불문하고 더 많은 경계를 열어젖히는 쪽으로 움직여왔다. 문학이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인 한, 리듬을 품든 이야기로 이어지든 극의 형식을 취하든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문학은 계속될 것이다.
 

우주적이고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 좀 추상적으로 여겨진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문학적 형식은 교체되는 것이라기보다 보충되고 추가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소설의 등장이 시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으며 비평의 등장이 소설을 위협하는 일은 없다. 소설가 정유정의 등장이 황정은이나 편혜영이 갖는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위협하는 일은 없으며, 소설가 장강명의 등장이 정유정이 만들어내는 소설형식을 위협하지 않는다. 이들의 문학(작품)이 황인찬이나 김현의 문학(작품)을 위협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반대로 문학의 이름은 좀더 풍요로워질 것임에 분명하다. 오늘날 문학은 여지없는 상품이지만 상품이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은 이런 면 때문이기도 하다. 개별 문학작품은 문학이라는 보편적 범주를 넘어서며 문학 범주의 전면적 재편을 이끄는 변압기 같은 것이다. 세계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문학을 두고 보아도 문학의 스펙트럼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릴 수는 있지만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며, 문학에 대한 음미와 판정이라는 점에서 비평 또한 나름의 미래를 그려갈 것이다.

 
 

2 누가 문학을 말하는가, 노벨문학상 논란
 

표절 사태로부터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참담한 상황이 문학 자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럴 가능성도 많지 않다. 2015년 여름부터 휘몰아친 문단의 참담한 상황에 대한 거리두기로서 문학에 관한 우주적 관점에서 작은 위안을 얻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6년 노벨문학상을 둘러싼 논란이 보여주었듯, 다시 지구 위 한국문단으로 돌아와서 보면, 지금 이곳의 문학의 앞날을 두고 마냥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범주는 세계의 주름화인 문학작품을 통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재구축될 것이라 말했지만, 대중가수인 밥 딜런의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문학의 범주를 누가 정하는가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스웨덴 한림원은 “미국 음악의 위대한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는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을 선정했다. 논란은 음유시인으로 비유되지만 통상 대중음악가로 분류되는 밥 딜런과 그의 작업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문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도전적 시도로 이해하면서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이들도 있으나, 문학이라는 이름 내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세부적 위계들에 대한 고려가 우선되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비난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돌이켜보면 노벨문학상이 통상적인 의미의 시인이나 소설가를 수상자로 선정해왔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밥 딜런의 수상이 생각만큼 쎈세이셔널한 것은 아니다.
 

따지자면 노벨문학상에 대한 몇몇 한국 문인이나 언론 매체의 과도한 관심에는 걸맞지 않을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에게조차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특정 문학가의 수상 여부는 기억이 엉키는 반면 막상 수상자 명단을 두고 보면 장르조차 알지 못하는 수상자나 시 한편, 소설 한편 익숙하지 않은 수상자도 적지 않다. 노벨문학상이 전 세계 문학에 부여되는 최고 권위를 대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도, 무라까미 하루끼가 지적했듯이 문학상은 “특정한 작품을 각광받게 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지는 못”1)한다.
 

노벨문학상을 둘러싼 세세한 논점들을 모두 들추자면 끝도 없겠으나, 한국문단에 한정해보자면,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단 내의 고민과 겹쳐져 문학의 쇄신에 대한 요청으로 받아들여졌다. 한국문단의 위기에 빗대어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를 되짚는 반쯤은 자동적인 반응을 두고, 서구를 보편으로 하는 특수한 형태의 문학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강고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결과적으로 세계-보편에 대한 열망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노벨문학상 논란의 여파를 들여다보게 된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의도와 무관하게 문학과 문학상의 관계를 둘러싼 착시의 일면을 가시화한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이 불러온 문학 범주를 둘러싼 논란은, 문학(작품)이 문학을 쇄신하는 것이라기보다 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이 문학을 쇄신하는 듯한 착시를 불러온다. 실질적인 의도나 권위를 행사하고자 한 어떤 의도가 없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노벨문학상 논란이 한국문단에서는 문학에 대한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는 외부적 요청으로서 수용되어버린 것이다. 일련의 논의의 흐름은, 문학이란 결과적으로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는 유럽문학의 동의어라는 망각된 사실을 불현듯 일깨운다. 문학 범주는 누구를, 어디를 중심점으로 견고해지거나 확장되는 것인가. 우주적 차원에서 문학의 미래를 낙관하면서도 지엽적으로 그 방향성을 조율하는 권력에 좀더 민감해질 필요는 이렇듯 절실하다.
 

 

3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 이후, 독서공동체의 구축


종종 비평의 기능이 협소화되고 비평가의 무용성이 강조될 때마다, 비평이 처한 전환기적 성격을 짚신의 시대에서 고무신의 시대로 넘어가던 시절로, 비평의 위기를 짚신짜기 장인의 생존 위기로 비유해보곤 한다. 짚신의 유용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짚신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기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탄식에 빗대어 비평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대한 하소연을 농담처럼 그렇게 풀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문학‘에 대한’ 음미와 판정,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한 세계 인식인 비평이 짚신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기술과 비교될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문학이 세계의 축도인가를 전면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한 1990년대 전후로 비평의 유용성에 대한 의구심은 지속되어왔다. 문학과 비평의 위기 담론을 동력 삼아 자가발전하면서도, 비평은 이미 오래전에 생명을 다한 죽은 제도의 형해만을 지금껏 이끌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2015년 표절 사태 이후로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에 이르기까지, 최근 그 질문의 강도는 보다 근본적이고 강력해졌으며 내부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시대와의 호흡 속에서 문학에 요청된 변화의 일환으로 축소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흐릿하고 불투명하고 애매한 것들 사이에서 비평에 관한 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평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비평만이 직면해야 할 변화인가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그건 아니다. 이때의 비평은 아무래도 계간지 형태의 문예지 시스템을 틀 지우고 등단과 시상 그리고 출판 시스템을 유지해온 동력을 가리킨다. 문제는 비평이지만, 문제가 비평만은 아닌 것이다.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도 여기 어디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문예지의 계간지 시스템, 등단 제도, 시상과 문학상 제도, 출판 시스템 전부가 비평의 이름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문단에 표절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15년 여름 이후로 방향과 결과의 실질적 의미와 무관하게,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이 일정한 종말을 맞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단과 비평(가)를 거점으로 한 문단 내 시스템들에 많은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문예지의 가시적 변화가 두드러진다. 편집위원의 교체가 이루어졌고, 잡지의 외양과 체제에 변화가 생겨났다. 기존 문예지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겨났다면, 『실천문학』이나 『자음과 모음』 『세계의 문학』과 같은 문예지가 각기 다른 이유로, 그러나 근본에서는 동일하게 출판문화의 구태가 낳은 결과로서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잡지로의 변화를 꾀하면서 휴간되거나 폐간되었고, 이는 계간지 시스템 변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문예지가 더이상 무용하다거나 문예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쓺』 『더 멀리』 『악스트』 『릿터』 등 반년간지, 계간지와 함께 계간지와 월간지의 사이에 틈을 내는 격월간 형태의 잡지가 등장하고 있다. 동인지 형태와 상업적 잡지의 공존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문예지는 시대의 요청에 반응하면서 좀더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기존의 계간지 체제를 좀더 강화한 잡지에서, 기존 편집 체제를 대체로 유지하는 잡지, 시각적으로 화려하며 감각적인 편집이 돋보이는 잡지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이러한 변화도 긍정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문학 혹은 문화의 현장성을 재빠르게 간취하고 의미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영화, 음악, 웹툰을 포함한 다양한 대중문화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으며, 다른 자리에서 문학을 둘러싼 진지한 질문을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한켠에서는 전문독자를 타깃으로 한 진지한 메타적 비평논의들이 강화되고 있으며, 다른 한켠에서는 작품과 그에 대한 소개 혹은 메타적 분석 전반에 걸친 소프트화가 진행되고 있다. 변화의 와중에서 문학에 관한 한 비평과 서평의 대상이 한국문학에 한정되던 강박적 경향도 점차 완화되는 중이다.
 

하지만 한줌도 안되는 문예지 고정독자 외에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새롭게 유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낙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개별 문예지가 표방하는 문학관이 따져보면 외양의 변화만큼 그리 차별적이지는 않아 보이는 것도 이런 판단의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더구나 꽤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현실 깊이 읽기를 시도하고 문학을 통해 시대 혹은 세계의 주름을 짚어보고자 하는 비평의 현실(사회) 개입적 성격이 약화되고 있음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서 포착된다. 비평이 현실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문맥화와 현재성의 획득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면, 지금으로서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역사적 문맥화는 문학사적 관점에 입각한 연구(자)의 몫으로, 현재성의 획득은 비평의 미셀러니(miscellany)화 경향 속에서 ‘소프트터치’의 시사평과 서평으로 대체되고 있다. 공간에 대한 상념을 풀어놓은 여행기 형식의 글쓰기를 포함해서 문학평론가들의 에세이집 출간이 줄을 잇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다각적 변화가 시도되는 가운데 새로운 문학의 기미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어쩌면 모색은 하고 있으나 여전히 큰 틀에서 몸통이 그대로인 문단이 새로운 문학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곳의 문학을 구성하는 제도 전반에 대한 질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학사의 박물관으로 돌려져야 할 문학의 존재방식이 관성에 따라 언제까지나 현재성을 담지한 시대정신의 구현물로 스스로를 오인하는 시간이 끝나지 않고 지속될지 모른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16, 75면.

2) 아니 따지자면 역사는 좀더 거슬러올라야 하는지도 모른다. 문학이 세계의 주름이라는 인식이 뚜렷해지기 시작한 1970년대 전후로 강도와 형태를 달리한 앞선 질문들이 반복되었다. 비평의 태생적 존재조건으로서의 대상 의존성은 비평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간 실현될 듯 보이던 때에도 매개적 성격이 야기한 본래적 불안을 비평의 존재론적 표식으로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한다.

 
 



 


 

소영현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지은 책으로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하위의 시간』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감정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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