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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대의 비평 (2)

소영현
2017년 02월 08일

문단–(비평)–문학





(이전 글에서 계속)


표절 사태 이후로 『창작과비평』이나 『문학동네』는 편집위원의 교체 이외에 별다른 변화 없이 잡지의 기조와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초기에 보여주었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의 속내를 드러내었다. 사건 초기 출판사 창비와 문학동네는 관계자들이 참석하지 않았던 표절 관련 논의의 일부를 잡지에 게재하는 방식으로, 편집위원의 책임있는 발언 대신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는 비평계 원로들의 비평관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표절 사태에 우회적으로 대응했다.3)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에 대한 출판사의 대응은 출간계획을 취소하는 등 기민하게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근본에서 그 태도 역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표절 사태든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든 이것은 말 그대로 문단의 적폐인 위계의 카르텔이 약한 고리를 통해 분출된 것임을 모르는 이가 없다. 좀더 진지하고 세심하며 복잡한 맥락을 복잡하게 읽어볼 노력이 필요하다. 비평의 혁신이 화두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가령 페미니즘 이슈를 다룬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의미는 그것을 연구와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퍼스펙티브(perspective)이자 방법론으로 채택할 때 의미있는 것이며, 따라서 젠더적 관점에 입각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1970년대 이후로 한국문단이 구획되어온 틀 자체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자 성찰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해야 하는 것이다.
 

계간지 시스템과 함께 그 중심에는 문학상 제도, 등단과 시상 제도, 출판 시스템이 놓여 있다.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지켜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문학인가? 우리는 그것을 문학이라 믿고 싶은가? 실제적으로 문학상과 등단, 시상 제도, 출판 시스템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모색되는 기미는 뚜렷하지 않다. 문학상과 등단 시상 제도는 그 자체로 문학의 범주를 재구축하고 새로운 문학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문학상 혹은 신인상 수상작을 통해 매번 다시 이루어진다. 문학을 둘러싼 제도들의 순기능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껏 등단 제도가 해온 문단 내 기능의 의미를 전부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문학상이나 등단 시스템은 문학을 특수한 관계망이자 뚫을 수 없는 써클로 만드는 주요 기제가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현재 존재하는 수많은 신인상 사이의 변별점은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등단은 문학 자격증의 취득 절차가 되었고, 문학을 한다는 것이 그 자격증을 발급하는 문단 내부로 진입하는 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문단은 촘촘하고 단단한 닫힌 시스템으로서 점차 더 강고해져온 것이다.
 

현재 운용되는 등단 제도를 통한 신진 문인 다수가 대학 국문과 혹은 문예창작과 출신이며 평론가 다수가 박사급 학위 소지자라는 점이 짚어지며 문학이 분과학문적으로 분류된 특정 영역의 산물이 되어버리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이 실제로 논의된 적은 없다.(이러한 논의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2017 신춘문예 등단 관련한 화젯거리는 올해 특정 대학 문학 관련 학과에서 한꺼번에 많은 신인을 배출했다는 사실이었다.) 독서공동체의 육성은 바로 이런 사정으로 문학상 제도가 담당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의 문학상은 ‘함께 읽는’ 문화를 만드는 쪽보다 문학공동체의 권위가 실린 독서 카탈로그 작성이나 독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쪽으로 기능하고 있다. 현재의 문학상 수상작은 출판시장에서 일종의 상품 보증서 역할로 그 소임을 다하는 편이다.4) 문학상의 유용성과 공정성 논의와는 별도로, 문학상 제도를 통한 단편적인 방식을 넘어서는 독자공동체의 구축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좀더 진지한 논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문학공동체의 유의미하고 실질적인 유용성이 독서공동체이자 독자공동체의 육성에 놓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의 여파는 문예지의 쇄신보다 긴급하게 문제화되어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5)  
 

 

4 문학과 그 바깥? 비판 민주화 시대의 비평


여전히 미흡한 채로, 한국문단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비평의 이름으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을 시간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가. 점진적으로 시간이 흘러 혁신이 점차 폭넓게 확대되기만 하면, 문학상이나 등단 제도, 나아가 문학 자격증 여부와 깊게 연루된 출판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1970년대 이후로 지속되었던 계간지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혁신적 시스템이 마련될 수 있는가. 그런 가능성의 실마리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인가.
 

계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혁신들이 충분히 긍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혁신의 내용이 불충분하거나 혁신의 자세에 진정성이 덜 깃들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평에 요청되는 변화가 문학과 문학 내부의 것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표절 사태로 터져나온 문단권력에 대한 탄핵의 목소리가 세월호참사를 겪으면서 사회 전체에서 공유된 엘리트층에 대한 불신이나 분노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가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여성혐오의 범죄화에 대한 사회적 공분과 무관하지 않다. 그간 문학 바깥이라 여겼던 것들이 문학 문제 전부를 채우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표절 사태가 그러하고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그러하며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가 그러하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이해법이야말로 문단의 위기에 대한 적확한 인식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은 아닌가. ‘문학과 그 바깥’이라는 기존의 인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고서는 계간지 시스템과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을 두고 요청되는 시대정신에 비스듬하게만 응답할 수 있을 뿐인지 모른다.
 

현재의 비평은 비평기준을 기성의 심미안에 기댈 수 없고 그러한 기준을 적용하거나 활용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다. 2000년대 이후로 비평에서 비판과 평가가 텍스트의 선별로 점차 대치(代置)되었으며, 문학과 그 바깥이 좀더 엄격하게 구분되어왔다. 문학적 행위는 문학 내부에서의 활동인 문학하기와 문학 바깥의 사안에 대한 사회적 발언으로 구분되면서, 점차 문학가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분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이후로 문학의 자율성이 강화된 경향은 우연이 아니다. 비평의 태생적 성격인 메타성, ‘~에 대한’ 음미이자 판정을 위한 텍스트(화된 현실)의 대상화 자체가 근본에서 위태롭게 된 것도 비평 행위가 문학과 그 바깥에 대한 것으로 분리되고 있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권위의 탈중심화의 여파로 비평적 권위가 상실되면서, 비평은 비평이라기보다 개별적 취향들의 다양한 공존 즉 취향 집합체가 되었다. 세계의 주름에 대한 읽기, 세계와 주름의 관계에 대한 깊이 읽기는 말할 것도 없이 그에 대한 판정들, 가령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세계의 주름’이나 세계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까지 이를 때 인정될 수 있는 비평의 전문성이, 해독되지 않는 자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한정되고 오해되기 시작했다. 전문가 시대가 끝나고 비판의 민주화가 시작된 지금 이곳에서, 이러한 비평의 전문성에 대한 오해나 비평 혹은 오늘날의 비평이 떠받치고 있는 문단 시스템의 퇴행적인 권위를 두고, 자신과의 연루를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연루의 부인은 역설적으로 ‘자각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성’에 부지불식간에 젖어 있었음의 폭로가 될 것이다. 대상화에서 개입의 시대로, 보편적 교양에서 개별적 취향의 시대로 움직이고 있는 비판의 민주화 시대에 비평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5 비평가의 과제
 

1920년대초 비평이 몰락하는 시대를 목도하면서 비평정신의 회복을 기초로 한 비평의 갱신을 위해 발터 벤야민은 잡지 『새로운 천사』(Anglus Nobus)를 기획한 바 있다. 끝내 발간되지 못한 잡지를 위한 서문에서 벤야민은 ‘시대정신의 현재성’(Aktualität)의 표출을 강조했다.6) 어쩌면 당대적 현실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독자대중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거나 기성의 독자대중과는 결별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독자대중의 요청에 대한 직접적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며, 시대정신의 포착이 가장 새로운 것의 선취를 의미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장 새로운 것의 포획은 각종 뉴스 미디어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좋지 않은가.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진정으로 현재적인 것으로서 형성되는 것”, 비평이 눈 돌려야 할 것은 그것이며, 진정한 당대성의 포착은 우선 문학과 문학 바깥이라는 경계의 재고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는 어느 비평이든 오늘날에는 기준들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유통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통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기준들은 예전의 미학을 제아무리 탁월하게 개발한다 한들 산출될 수 없다. 오히려 비평은 프로그램을 바탕에 깔고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그것이 비평에 당면한 과제들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정치적이고 혁명적이지 않으면 안된다.”7)
 

그러나 이를 둘러싼 보다 뚜렷하고 구체적인 실천론을 요구받는다면 나는 고백해버려야 한다. 새로운 문학 풍경에 대한 뚜렷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면, 명쾌한 해법이 떠올랐다면,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깃발을 들고 나를 따르라 기꺼이 선언하리라(문학에 그리고 비평에 그 정도의 애정과 책임감은 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문학 풍경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지금껏 무용한 것에 불과한 상념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당분간도 오래 고민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그런 상념들만을 펼쳐놓을 수 있을 뿐임을 말이다. 궁극의 지향은 있으나 코앞의 길을 새로 내기 어려워 방향을 잃고 맴돌고 있을 뿐임을 말이다.
 

다만 광화문 촛불집회의 내부에 있는 것과 그것이 외부에서 보이는 모습 사이의 간극을 빌려 작은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군중의 거대한 흐름이 마치 일사분란하게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보이고, 실제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십수백만개의 촛불이 모이고 외치며 행진한다. 하지만 그 내부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흩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한다. 촛불집회의 거대한 흐름에는 뚜렷한 방향성이 있지만, 내부에서는 수많은 서로 다른 생각들이 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브라운운동을 한다. 촛불집회의 힘은 브라운운동의 온전한 합 이상이다. 촛불집회의 힘이 내부의 움직임의 합보다 크듯, 문학은 지금껏 언급해온 부분들의 합보다 클 것이며, 촛불집회가 이전의 집회와는 전혀 다른 형식이듯, 문학의 혁신적 시스템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래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전의 모든 것을 청산하는 방식이라기보다 문학이라는 시스템이 하나의 복잡성 유형에서 다른 복잡성 유형으로 옮겨가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는 이 결과물의 도래를 위해 통렬한 자기성찰을, 실패로 귀결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상상을, 문학과 그 바깥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찰을 각기 다른 자리에서 지속하는 일이 부분의 합보다 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 이것이 두 잡지의 표절 사태에 대한 대응의 전부는 아니다. 다만 『창작과비평』이 정은경의 「신경숙의 표절논란에 대하여」, 김대성의 「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 윤지관의 「문학의 법정과 비평의 윤리」(『창작과비평」 2015년 겨을호)를 게재하고, 『문학동네』가 김병익의 「‘비평-가’로서의 안쓰러운 자의식」, 도정일의 「비평은 무슨 일을 하는가?」, 최원식의 「우리 시대 비평의 몫?」(『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을 배치하면서, 절묘하게 비평의 지형 자체를 다시 그려준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갖지만, 그러나 근본에서 비평 자체의 권위에 대한 의구심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비평가라서 그러하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4) 세계적으로 문학상의 기능 또한 그러한데, 2007년 출간된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5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후로 그간의 누적 판매부수(6만부)의 10배를 넘는 판매부수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5)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의 여파에 대한 대안적 모색이 없지 않다. 시도의 유의미함에 대해 충분히 동의한다. 그럼에도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의 문제를 세대론적 관점에서 풀어보려는 시도에는 세심한 고찰이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이 쇄신의 이름으로 해왔던 관행의 반복을 넘어서는 혁신적 시스템의 상상이 요청된다. 문학을 하는 일이 생계를 위협하는 일이 되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전에 말 그대로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원래 문학을 한다는 것이 배고픈 일이라거나 실질적인 독자와 호흡하는 문학을 생산하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라는 식의 진단이 본질적 해결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임을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과 경제활동과의 거리는 어떻게 좁혀질 수 있으며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 더 좁혀서 말해볼 수도 있다. 빈곤노인 10명 중 7명이 여성인 현실이다. 이러한 사정은 여성 문인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문인 전체가 대개 그러하지만, 특히 비혼 여성 문인들은 문학가로서의 미래를 구상하기에 앞서 눈앞에 놓인 생계를 어떻게 꾸리고들 있는가. 비평 시대의 장기지속의 여파로서 따져 물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들은 다른 자리를 기약한다.

6) 발터 벤야민 「잡지소개: 새로운 천사」, 『서사·기억·비평의 자리』, 최성만 옮김, 길 2012, 506면.

7) 「문학비평에 대하여」, 같은 책 573면.

 



 

 


 



소영현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지은 책으로 『분열하는 감각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 『하위의 시간』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감정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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