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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 거룩하게, 야하게 (1)

김태권
2017년 02월 24일
‘예쁘다’고 소리치지 말라
 
1990년대 말, 대학에 그냥 학생회 말고 여학생회라는 기구가 막 생길 무렵의 일이다. 집회현장에 ‘여학생회 준비위원회’라는 못 보던 깃발이 나타났다. 깃발을 들고 나타난 친구들은 당연히 대부분 여성이었다. (‘여학생회’니까 당연하겠지.) 모여 있던 남학생들은 열광했다. 박수를 하고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질렀다. “예쁘다, 예쁘다”라고 소리치는 남자도 있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어떤 진압경찰이 체포된 여학생들의 몸에 손을 댔다는, 짜증나는 소문이 돌던 시국이었다. 움츠러들지 말고 힘을 내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학생회’ 친구들 표정이 사뭇 떨떠름했다. 이게 웬일인가. 아니, 사실은 당연한 반응인데, 우리 남학생들이 몰랐던 것이다. 남자들이 휘파람 불고 환호를 보내는 일이 영 짜증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부끄러운 변명이지만, 배우지 않으면 모른다. 그때만 해도 한국사회 남성들은 성적 괴롭힘이 무엇인지 배운 적이 없었다. 이십년도 더 된 이야기란 것 역시 변명이다.
 
한 학생이 마이크를 잡더니 탐탁잖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예쁘다’고 소리치지 마세요. 여성을 ‘집회의 꽃’이라 부르는 남자들이나, 집회에 참석했다고 성희롱하는 남자들이나, 우리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거든요.” 시끌시끌하던 집회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우리는 부끄러워 낯이 화끈거렸다.
 
그때부터 나는 배우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 어렵지만 차차 알아보기로 하자.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토룬의 「막달라 마리아의 승천」
 
먼저 서양미술에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Maria Magdalena)’의 모습을 소개한다. 첫 작품은 폴란드 토룬(Toruń) 지방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승천」. 작품 속 마리아는 온몸이 털로 뒤덮인 듯 보인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스타워즈Star Wars>의 추바카(Chewbacca) 같기도 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예수의 제자다. ‘예수의 열두 제자’에는 들지 않는다. 열두명이라고 남자만 세는 걸 보면, 옛날 사람들은 마리아를 그냥 ‘예수가 좋다며 쫓아다니던 여인’ 정도로 얕잡아본 듯하다. 남자가 아니면 제자가 될 자격도 없다는 여성 차별이다. 하지만 『성서』를 잘 보면 마리아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성서』의 ‘4대복음’을 볼 것. (『다빈치 코드』 소설과 영화는 비추!)
 
『신약성서』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참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베타니아(Bethania)의 마리아랄지. 그의 죽은 오라비 라자로(Lazaros)를 예수가 살려준 일이 있다. 나중에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향기나는 비싼 기름을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주기도 한다. 이 마리아와 그 마리아는 다른 마리아인데, 중세사람들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단다. 발을 닦을 정도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부터 떠오른다. 그러니 크리스트교 미술에서 몸을 덮을 만큼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여인을 보면 ‘아, (중세사람들이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헛갈린) 막달라 마리아구나’라고 생각하면 마침맞다.
 
한편 털옷은 중세 크리스트교에서 고행의 상징이었다. 나는 털로 된 스웨터를 맨살에 입어본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입어보지 않고도 알 일이지만. 『신약성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Johannes)도 털가죽을 입고 광야에서 고행을 했다고. 중세시대 털옷을 입고 광야에 사는 사람은 ‘은자’라고 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전에 만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를 그리면서 나는 ‘은자 피에르Pierre l’Ermite’를 맨살에 털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 나름 고증에 충실한 만화라는 사실을 이 기회에 자랑하고 싶다.) 보통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털옷 입은 남자는 세례 요한, 자기 머리카락을 털옷처럼 두른 여성은 막달라 마리아. 알아두면 미술관 가서 편하다. 같이 간 사람 앞에서 잘난 척도 할 수 있다.

 
틸만 리멘슈나이더 「막달라 마리아」
  
이것은 독일사람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의 작품. 토룬의 마리아와 같은 도상으로, 둘 다 고딕양식이다. 표정은 조금 더 심각하다. 아주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다. 앞선 작품보다 더 거룩해 보인다. 그런데 머리털 사이로 가슴도 슬며시 드러냈다. 살짝 야한 느낌도 있다. (리멘슈나이더는 끔찍한 운명을 겪은 조각가인데,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남성의 판타지 속에 실제 여성은 간 곳 없고
 
그레고르 에르하르트 「막달라 마리아」
 
이 작품은 독일조각가 그레고르 에르하르트(Gregor Erhart)의 아름다운 조각이다. 원래는 마리아 주위에 작은 천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성서』가 아니라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승천한 후 막달라 마리아는 광야에서 살았는데, 날마다 천사들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 천국의 음식을 나누어줬다나. 중세다운 대단한 허풍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오늘날 마리아 부분만 따로 떼어 전시하고 있다. 루브르박물관에는 유럽 북쪽의 중세조각을 모아놓은 방이 있다. 방문객이 많지 않아 천천히 감상하기 좋은 장소. 나는 평소에 “막달라 마리아의 표현에 나타난 남성적 시선은 문제있다”고 말하지만, 이 작품 앞에서는 넋을 놓았다.
 
이 작품은 경계선에 놓인 작품이다. 두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어려운 이야기지만, 양식적으로 고딕과 르네상스의 경계에 있다. 앞의 두 작품은 고딕조각인 반면 이 작품은 고딕이기도 하고 르네상스이기도 하다. 딱딱한 표정과 머리카락은 고딕에 가깝지만, ‘짝다리’ 짚은 자세(어려운 말로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고 한다)와 나체는 르네상스의 특징이다.
 
둘째, 주제 면에서 거룩하기도 하고 야하기도 하다. 아름다운 마리아는 젊은 시절에 ‘타락한 여인’이었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로 왕년에 지은 육체적인 ‘죄’(?)를 참회하며 살았다나. 역시 『성서』에는 없고 ‘전설’에만 나오는 이야기. 야한 여인이면서 동시에 거룩한 여인이라는, 남자들의 오래된 판타지. 요즈음에도 이런 데 ‘하앍하앍’하는 남성들 많다. 남자들 판타지는 이상하다. 야할수록 더 거룩하고, 거룩할수록 더 야하다. “남성에게 여성은 성녀 아니면 탕녀”라는 말은 유명하다. ‘성녀이자 동시에 탕녀’라면 남자는 더욱 흥분할지도. 여기서 여성은 인격체가 아니라 판타지의 대상일 뿐이다. 같은 남성끼리는 좀처럼 그렇게 바라보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 왜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을까? 현실의 여성이 상상 속 여성과 다르다면, 현실과 다른 상상을 고치는 것이 정답일 터. 하지만 현실의 여성을 판타지 속 여성에 맞춰 뜯어고치려는 남성이 뜻밖에도 적지 않다. 아무려나 거북한 이야기다.
 
 
작가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티치아노 「막달라 마리아」(1533)
 
작품 속 여성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으로 온몸을 감쌌다. 참회하고 기도하는 듯, 눈은 하늘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1533년 무렵 베네치아(Venezia) 르네상스의 대가 티치아노(Tiziano)의 작품이다. 배운 것을 써먹어보자. 머리카락을 두른 것을 보면 이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그런데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꽤 야해 보인다. 노출이 심해서 그런 걸까?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흔한 오해를 하나 짚고 넘어가자. 남자들이 특히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외설이냐, 외설이 아니냐? 그 기준은 노출이 아니다. 여성을 인격으로 대하느냐 성적으로 대상화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작품의 경우는 어떨까.
 
판단하기 어렵다. 앞서의 작품들과는 다르다. 첫째로, 양식의 차이. 토룬의 「막달라 마리아의 승천」,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막달라 마리아」는 전형적인 고딕. 에르하르트의 <막달라 마리아>는 고딕에 더하여 초기 르네상스의 특징도 가지고 있지만, 이 그림에 비하면 경직된 듯 보인다. 티치아노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가. 그가 그린 마리아는 피부와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듯하다.
 
둘째로, 주제의 차이. 앞서 우리가 살펴본 「막달라 마리아」는 종교적인 작품. 가슴이 살짝 보이건, 온통 알몸을 드러냈건 상관없다. 성당에 간 남자가 저런 조각을 마주치면 어떨까. ‘어라, 좀 야한 것 같은데’ 생각이 들다가도, ‘아이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라고 반성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마리아」에 대한 특이한 해석도 있다. 그가 헐벗은 까닭은 수십년 동안 광야에서 고행만 하느라 옷이 해졌기 때문이라나. 원래 사치스럽던 막달라 마리아가(‘막달라’는 큰 고을의 이름이라고) 금붙이도 보석도 없이 심지어 옷도 없이 헐벗었다는 건, 종교적인 ‘청빈’을 강조한다고도. 정말 그럴까? 글쎄. 갖다 붙이기는 잘하네. 옷이 다 해질 정도인데 피부와 머릿결은 왜 저렇게 뽀송뽀송한지. 어쨌거나 나중 사람들 보기에는 주제가 헛갈릴 지경이다. 티치아노 스스로도 고민이었나보다. 30년이 지나 1565년에 비슷한 작품을 또 그렸는데, 그때는 머리카락 밑에 제법 옷을 갖춰 입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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