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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

이은지
2017년 03월 07일
 문단-(타자)-문학


울타리
 
내가 아는 한 채식주의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려 한다. 그와 마주앉는 밥상머리는 그가 채식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우 미묘한 기류로 나를 죄스럽게 만드는 특수한 공간이 되곤 하였다. 함께하는 사람들은 채식주의자 앞에서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 그래 너는 고기를 먹지 않지, 동물들을 생각하면 나도 그래야 하는데 고기를 끊을 수가 없네, 너의 선택을 존중해 등등 한마디씩 던져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런 말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식습관이 거듭 상찬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의 밥상머리에서 스스로를 남들과 도덕적으로 구별 지으며 우아한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면모를 한껏 뽐내곤 하였다. 죽은 고기나 생선을 씹어 삼키는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외에도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로서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을 몇개 더 달고 다니면서 내 마음속의 양심과 공조하여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공격하기를 즐겨 하였다. ‘즐겨’ 하였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정치적 올바름이 나를 포함한 주변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강화시키는 데 주로 바쳐졌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죄스러움으로부터 어느정도 놓여난 지금,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올바름이 횡행하며 맹위를 떨치는 지금, 나는 나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이 죄스럽지만은 않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만 고기를 즐겨 먹는다. 나는 이 땅의 재벌들이라면 치가 떨리지만 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돈을 지불하고 가방이나 커피를 산다. 나는 여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에 반대하지만 마초인 남자와 사랑하며 함께 산다. 나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은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증여한 구조적 모순임을 이제는 어느정도 알기에, 그것이 꼭 죄스럽지만은 않다.
 
공장식으로 사육되고 도축되는 동물을 불쌍히 여기거나, 전지구적 육식이 가져오는 환경파괴에 저항하여 흔히들 실천하게 되는 것이 ‘채식’이다. 그런데 채식을 위해서는 동물을 공장식으로 기르는 만큼이나 농작물 또한 광범위하고 계획적으로 수확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또한 세간의 믿음과 달리 채식은 육식을 통해서만 섭취할 수 있는 영양소의 공급을 끊어버려 육식과 또다른 방향에서 몸을 망친다. 채식을 둘러싼 이 두가지 역설이 주는 교훈 역시 두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는데, 1) 세계의 악(육식)을 피하기 위해 선(채식)을 택해봤자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므로 결국 결정적인 것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2) 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지 악에 비해 차악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두가지를 확정짓는 것은 어쩌면 채식이 아니라 채식주의자의 태도에 있으리라. 내가 아는 한 채식주의자에 대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채식주의자는 채식이라는 특정한 도덕 및 신념에 반하는 것들을 울타리 밖으로 몰아내고, 울타리 안의 협소한 자기기만적 세계를 가꾸는 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여기는 이다. 그러나 협소한 정치의 바깥으로 배제한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배제된 영토 나름의 논리와 법칙 속에서 무성히 자라나 언젠가는 울타리 안으로 침범해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울타리를 치는 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여겨야 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채식주의자를 ‘우아한 나르시시스트’라고 빈정거리기는 하였지만, 이 표현이 순전히 나의 감정의 소산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신념의 중개자이기보다 신념의 화신이기를 즐겨 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의 태도에는 나르시시즘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 울타리 너머를 비난하고 냉소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더 좁고 더 높이 울타리를 쌓아 올려, 자신이 지지하는 신념이 자신을 남들과 구별지어주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에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더러는 그것이 그들의 은밀한 지향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자신이 택한 신념에 기대고 복종하여 주변과 무관한 특별한 주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모두가 ‘아무나’에 불과한 황량한 벌판에 홀로 울타리를 치고, 그 내부를 사수하면서 말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신념이 설령 자신의 기대와 다른 양상으로 나아갈지언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꺼이 바치는 것과, 그 신념을 보전할 수 있는 고유한 세상을 가공하여 거기에 안주하고 마는 것. 전자에 비해 후자에 대부분이 투항하는 이유는 그것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후자에는 그 보전된 신념을 투과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매혹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세계로부터 점점 유리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금 내가 아는 한 채식주의자에 대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정치적으로 올바름은 정치적 실천이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그 누구에게도 훼손당하지 않겠다는 편협한 주관성의 표현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깃발
 
촛불이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가공할 규모로 타오르며 거의 매일 경탄 속에 보도되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자. 그 당시 보도를 통해 전해지던 촛불은 폭력시위도 희생자도 없는 평화로운 시위, 풍성한 공연이 벌어지고 유쾌한 풍자가 벌어지는 축제 같은 시위, 질서있게 퇴진하고 쓰레기 한점 남기지 않는 성숙한 시위였다. 그런 현장에 찾아가 촛불을 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후진 정권에 맞서는 선진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축제란 것의 알맹이일 카오스 상태는 빠진 김빠진 축제”1)는 어딘지 이상하다. 평화롭고 축제 같은 시위라는 틀 바깥에는 분명 물대포와 최루가스가 동원되고 연행자가 속출하는 시위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위에는 거의 언제나 ‘금속노조’나 ‘전국노동자연합’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지 않았는가. 그 많던 카오스적인 시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많던 카오스적인 시위들은 ‘폭력 시위’와 ‘폭력 없는 시위’라는 틀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선진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에 도취되어 ‘폭력 없는 시위’에 쉬이 가담한 이들의 세력화는 이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성숙한 시민의식에 걸맞지 않은 것들은 그렇게 평화롭게 광장에서 퇴출되어갔다. 분명 촛불시위는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려는 한결같은 마음들이 연출한 기적과도 같았지만, 동시에 그 마음에 대한 애착은 노조의 깃발도, 여혐 혐의를 사는 어떠한 발언도 허용하지 못할 만큼 촛불을 거스르는 많은 것들을 부지중에 배제해나갔다. 그렇게 어느새 촛불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의 총체로서 이 비루한 현실의 한가운데 찬연히 흩어졌다 모이기를 거듭하고 있다. 촛불이 해방적인 사건의 ‘지속’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이 절망적이면 절망적일수록, 그에 저항하는 경험이 해방적이면 해방적일수록, 그 경험을 현실에 접속하여 변화를 도모하려는 괴롭고 지난한 과정에 뛰어들기보다는 단지 그 경험에 기대어 현실을 회피하고픈 유혹 또한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수적인 우열과 무관하게 완전히 양분된 광장의 모습은 이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촛불도 태극기도, 나의 마음과 꼭 맞는 이들과 결집한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 이상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두 진영은 결코 충돌하지 않으며 충돌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무언가를 뿌리째 뒤흔들 만큼 다른 누군가와 부딪치고 뒤섞여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리라. 반대 진영과 부딪치기는커녕 자신의 몸에 칼부림하고 손가락을 자르는 일부 격앙된 보수집회참석자의 태도는 이를 방증한다. 온건하게 나를 접속할 수 있는 진영에서 확장된 나의 목소리를 터뜨리는 데 안주하는 광장에 유혈사태가 없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이 평화로운 광장에 나부끼는 ‘장수풍뎅이연합회’나 ‘민주묘총’ 깃발은 그래서 매우 기괴하다. 그것은 현실의 어떠한 이해관계와도 무관한, 진영이 없는 깃발이다. 장풍연 아래에는 누구든지 설 수 있기에, 장풍연이 나부끼는 광장에는 타자가 없다.
 
 
현장
 
나는 최근의 문단이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를 자처하는 모습이 자못 우려스럽다. 세월호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작업에 적극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퀴어적인 정서에 귀 기울이고, 페미니즘적인 요구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문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실천에 의식적으로 앞장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마음의 진정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을 어떤 태도로 실천해야 할지 좀더 고민해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예컨대 문단에서 소수자의 목소리가 강화된 것이 정말로 소수자의 몫을 획득했기 때문인지, 혹은 단지 소수자 이외의 목소리는 차단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닌지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 후자의 경우를 통한 상상적 쟁취는 결국 상상에만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자를 주체의 자리에 들여놓으며 타자화된 다수를 배제한 세계는 소수자가 다수로 탈바꿈하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많은 목소리가 공명하는 현실을 진정으로 실현하고 싶다면 목소리들이 갈등하고 화해하기를 부단히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세계에 균열을 내어 인식을 변화시키는 끔찍한 유혈사태 없이는 그 어떤 노력도 현실에 기입될 수 없다. 현실을 타자화하고 스스로 게토화된 상태에서 얻어낸 정치적인 올바름은 내가 보기엔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를 찾기 위해, 의미를 만들기 위해, 문학의 현장성은 강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문학은 현실로부터 유리된 울타리 안의 상상적 세계이기를 스스로 거부해야 한다. 정말로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문학은 좀더 ‘오염’되어야 한다. 예컨대 세월호 문학에는 세월호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현실 또한 기입되어야 하고, 페미니즘 문학에는 페미니즘을 모르는, 혹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현실이 기입되어야 한다. 그런 더럽고 지저분한 충돌의 과정 없이 뜻하는 바를 거스르는 것들을 깨끗이 도려내고서 의미를 획득하는 문학은 신자유주의의 기율을 내면화한 자폐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 황량한 벌판에 좁고 견고한 울타리를 치고 들어앉은 문학에 다름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그는 언젠가부터 채식을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이고 끔찍한 나르시시스트지만, 고기를 집어먹으며 젠체하는 그는 그나마 좀 현실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여전히 불편하지만, 그가 현실의 모순을 일부나마 나와 공유한다는 사실은 분명 나를 좀 덜 불편하게 해준다. 적어도 이제는 밥상머리에서 그와 논쟁이라도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 서동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한겨레 2016.12.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4018.html)




이은지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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