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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권, 가난하지 않을 권리: 궁핍으로부터의 자유(2)

김태권
2017년 03월 10일
(이전 글에서 계속)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사진에 담을까
 
워커 에번스 「버드 필즈(Bud Fields) 가족」
 
워커 에번스(Walker Evans)는 도로시아 랭과 같은 시대 같은 주제를 두고 다른 사진을 찍었다. 워커 에번스의 작품을 나는 더 좋아한다. 랭의 사진은 처음 보는 순간 심금을 울리지만, 에번스의 사진은 보고 또 봐도 물리지 않는다. 워커 에번스는 유럽 유학파였다. 그래서인지 화면이 큰 회화작품에 익숙했던 것 같다. 그의 사진에는 수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정리가 잘되어 있고, 조형적인 완성도도 뛰어나다. 바로크미술에 흔한 집단초상화를 보는 느낌이다.
 
랭과 에번스의 사진을 비교해보자. 랭은 비교적 작은 카메라를 썼다. 배경을 과감히 포기하고 사진 찍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표정을 담았다.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반면 에번스는 큰 카메라를 썼다. 그래서 인물, 배경이 되는 건물, 집기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찍었다. 사진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랭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면, 에번스는 머리를 차갑게 한다.
 
나는 에번스 사진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좋다. 에번스가 찍은 사람은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랭의 사진은 감동적이지만, 사진 속 인물은 왠지 우리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것 같다. 우리는 「이주자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뭉클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머니의 슬픔과 강한 의지. 어머니는 언제나 슬퍼하고 또 언제나 이겨낼 것 같다. 희로애락에 휘둘리는 우리와는 달라 보인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그 사진을 잊는다. 반면 에번스의 사진은 정서적인 부담이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사진 속 인물이 궁금하다. 그가 사는 곳, 그가 함께 사는 사람, 그가 가진 물건 따위를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을 보고 돌아선 다음에도 에번스의 인물은 잊히지 않는다.
 
랭이냐 에번스냐. 가난한 사람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어느 쪽 방식이 더 적절할까. 나는 에번스 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랭을 지지할 사람도 많다. 랭의 사진이 더 대중적이다. 당시 사진가들에게 작업을 의뢰했던 농업안정국도 랭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에번스는 중간에 농업안정국 일을 그만두고, 도시로 돌아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시민들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집의 제목은 얄궂게도 ‘이제 유명한 사람들을 찬양하자’.
 
독자님 생각은 어떠신지? 독자님이 가난한 사람을 만나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처럼 찍고 싶은지? 랭처럼, 아니면 에번스처럼?
 
 
가난하다고 게으른 사람은 아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거지 소년」
 
중학생 시절, 나는 거지 아저씨랑 친구였다. 다리가 불편한 그는 성당을 오가는 사람들한테 동전을 받곤 했는데, 사람이 없을 때면 성당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성당 자판기에서 백원짜리 커피를 함께 마시다가 친해졌다. 주말에는 성당에 오지만 주중에는 절에 가서 동전을 모은다고 했다.
 
명석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태국의 사례를 들어 사회 갈등의 측면에서 왕정도 좋은 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 견해지만, 외신 보는 사람도 별로 없던 80년대에 외국 정세를 초들어 분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복지가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는 말, 종종 듣는다. 내 생각은 다르다. 거지 아저씨와 친해지며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일을 하려 해도 운이 안 따른달지 갑자기 지병이 도진달지, 사람이 가난해지는 데는 실로 수많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은 도와야 하지만, 일에서 손놓고 지내는 가난한 사람은 돕지 말라? 야박한 주장이다. 사회권의 관점으로 보면 틀린 말이기도 하다. 사회권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제적 도움을 받아 마땅하다. 정당한 권리의 행사니까.
 
이 작품은 에스파냐의 화가 무리요(Murillo)가 그린 <거지 소년>. 무리요는 어린이 그림과 종교 그림, 이 두가지가 특히 뛰어났다. 미술사를 깊이 공부한 사람은 무리요의 어린이 그림은 그의 종교화만 못하다고 박하게 평가. 하지만 인기는 어린이 그림 쪽이 높다. 나는 특히 이 그림이 좋다. 무리요는 거지 소년을 비참하게만 그리지 않았다. 옛날에 거지 아저씨와 농담하던 생각이 난다. 그는 당당한 사람이었다.
 
거지 아저씨는 결국 몇년 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슬펐다. 사회권이 보장되는 사회였다면 그는 구걸 말고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시사평론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아직도 가끔 그를 생각한다.
 
 
가난한 시인에게 돈을
 
오토 딕스 「이바르 폰 뤼켄의 초상」
 
품이 맞지 않는 헐렁한 옷. 그나마도 소매가 해졌다. 좋은 옷 해입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가난한 사나이. 영양도 부족해 보인다. 낯빛이 영 좋지 않다. 우리를 바라보는 저 눈빛이 오직 눈에 띈다. 자존심 가득한 눈빛이다. 몰락한 지식인 신세지만, 대단한 긍지를 품은 것 같다. 그 당당함이 보는 사람 마음을 흔든다.
 
20세기 독일화가 오토 딕스(Otto Dix)가 그린 <이바르 폰 뤼켄Iwar von Lücken의 초상>이다. 폰 뤼켄은 가난한 시인, 아니 엄청 가난한 시인이었다. 전 재산이라곤 담뱃값에 넣은 동전 몇닢이 다였다. 평생에 걸쳐 시집을 한권 냈단다. 그것도 아주 얇은 시집이란다. 길어봤자 스무줄을 넘지 않는 스물아홉편의 시, 이것이 그가 남긴 전부였다. 우리가 폰 뤼켄을 기억하는 까닭은 사실 단 하나, 그가 이 그림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땀 흘려 일해야 한다는 요즘 세상의 야박한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몇년에 한편씩 짤막한 시를 내놓는 것 말고는 성과물이 없었다. 열심히 글을 쓰다가도 성에 안 찬다며 홀랑 태워버렸다니, 시장경제의 시대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미술사에서 오토 딕스의 위치는 신즉물주의. 아름답지 않은 세상의 모습을 아름답지 않게 그리는 화가라고 생각하면 얼추 들어맞을 듯하다. 때때로 실제보다 더 추하게 그렸다. 폰 뤼켄의 차림새와 방구석도 그렇다. 시인의 고상한 정신이 더욱 도드라지도록, 딕스는 허름한 환경을 더 허름하게 묘사했다.
 
베를린미술관에서 처음 이 작품을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관에서 나오자 ‘딕스카페’가 보였다. 검은색과 짙은 보라색으로 정갈하게 꾸며놓은 테이블마다, 그림과 똑같이 장미꽃을 두었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허름한 맥주병에 꽂힌 장미는 가난에도 굴하지 않는 고매한 정신을 상징한다고.
 
 
사회권과 자유권
 
카를 슈피츠베크 「가난한 시인」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은 카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특이한 화가다. 당시 유행하는 사조에 신경쓰지 않고,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그렸다. 방 안에 가득한 책 더미. 침대에 누워서도 원고를 쓴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원고다. 그림 제목부터가 ‘가난한 시인’. 보아하니 지붕 바로 밑 다락방이다. 추운 날 춥고 더운 날 더운 방이라 방값이 싸다. 그나마도 비가 새는지 방 안에 우산을 폈다.
 
팔리지 않는 글을 쓰는 작가에게, 돈을 주어야 하나? 시장경제의 관점으로 보면, 택도 없는 이야기. 하지만 사회권의 관점으로 보면 다르다.
 
인권의 역사에서 사회권은 비교적 최근에 인정된 개념이다. 오래전부터 인정받던 인권 개념들과 결이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는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자는 개념이다. 정부가 괜히 나서지 말라는 것. 반면 사회권을 실현하려면 정부가 할 일이 많다. 개인의 재산을 세금으로 거두어 나눠주는 일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사회권은 자유권과 충돌하는가? 논쟁이 여전하다. “시장경제 원리와 어울리지 않으므로 기본권으로 치지 말자”는 과격한 주장도 있단다.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정부만이 아니다. 시장경제 원리도 때때로 개인의 자유를 억누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마음껏 시를 쓰고 싶지만, 폰 뤼켄이나 그림 속 가난한 시인처럼 되기 두려워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옛 친구 거지 아저씨는 여러가지 이유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사회권이 보장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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