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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까: 장애인의 권리와 장애에 대한 시선(2)

김태권
2017년 03월 21일
(이전 글에서 계속)


로트레크는 무엇을 바랐을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마르셀 랑데가 ‘실페리크’ 공연에서 볼레로 춤을 추다」
 
시원시원한 그림이다. 춤추는 사람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다. 실제로도 몸놀림이 저렇게 가벼울까? 물론 과장이다. 하지만 그 과장 덕분에 더욱 아름답다.
 
제목은 「마르셀 랑데(Marcelle Lender)가 ‘실페리크(Chilpéric)’ 공연에서 볼레로 춤을 추다」. 그런데 장애인 인권과 이 그림은 무슨 관계인가. 그림 속 마르셀 랑데는 너무나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가? 사실 나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 Lautrec). 장애가 있던 로트레크는 자기 그림처럼 맵시있게 움직일 수 없었다.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춤추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의 움직임을 그려내는 솜씨로는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로트레크만한 화가가 없다. 자유로운 몸놀림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가에 대해, 로트레크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정작 스스로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 괴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하다.
 
그림 공부하던 시절의 일화다. 초보 만화가들이 과제로 만화를 그려오면, 프로젝터로 확대하여 모두 함께 보며 ㅊ선생님께 조언을 듣는 강연이었다. 어떤 만화가가 번번이 액션 활극을 그려왔다. 높이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돌며 발차기를 날리는 초인적 인물. 거의 불가능한 자세였다. 그러다보니 해부학이나 원근법에서 세세한 실수가 많았다. 그런데 신기했다. 남들 보는 앞에서 실수를 지적당하면 다음 시간에 소심하게 그려올 만도 한데, 어김없이 더 과감한 자세를 그리는 것이었다.
 
“아, 이건 이상한데요. 이런 자세는 나올 수가 없어요. 불가능해요.” 몇번이고 그림을 고쳐주던 선생님은 마침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어느 분이 그리신 그림이에요?” 우리 모두 궁금하던 참. 교실 구석에서 어느 작가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불가능한 몸놀림으로 날아다니는 초인을 그려오던 사람은, 휠체어에 타지 않고는 가까운 거리도 이동하기 어려운 작가였다. 장애인신문에 만화를 기고하던 왜소증 만화가.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나도 모르게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자세는 불가능한 게 맞아. 스스로 동작을 해보면 금방 알 텐데, 왜 그걸 모르지? 이상하군.’ 나의 생각은 얼마나 지독한 독선인가. 나는 평소 습관대로 세상에는 비장애인만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말이다. 세상을 모르는 사람은 나였다.
 
 
장애인 인권의 특수성
 
모리스 기베르 「툴루즈 선생이 로트레크 선생을 그리다」
 
모리스 기베르(Maurice Guibert)의 사진작품 「툴루즈 선생이 로트레크 선생을 그리다」. 언뜻 보기에는 즐거운 작품이다. 로트레크는 재미있는 사진을 몇점 찍었다. (일본미술을 좋아하던 로트레크가 일본옷을 입고 일본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사진도 있다.)
 
로트레크는 스스로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 뛰어난 그림솜씨로 근사한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이렇게 장난스러운 사진과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캐리커처만 남았다. 상처 많은 사람은 솔직하기 어려운 법. 로트레크도 그랬을까.
 
자신과는 다른 몸을 가진 비장애인 무용수를 그리며, 로트레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샘이 났을까, 부러웠을까. 아니면 그림에만 신경을 썼을까. 알 수 없다. 그리고 상상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로크레크의 속마음을 비장애인인 내가 멋대로 재단하는 것조차, 어떤 편견에 빠질지 모를 일이니. 다만 걷고 춤추고 달리고 싶은 욕망은 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였으리라는 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것 같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이동할 권리, 장애인은 누리기가 쉽지 않다. 비장애인이 이 권리를 누리려면? 주위에서 내버려두면 된다. 하지만 장애인의 경우는? 도움이 필요하다.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는 돈이 들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유권과 사회권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애인의 자유권은 사회권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장애인 인권의 특수성이다.
 
장애인 인권을 위해 사회는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쓰는 비용은 너무 적어 보인다. 저상버스를 늘리는 비용은 아끼면서,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진압할 때 드는 비용은 아끼지 않는 것 같다. 
 
유럽의 어느 인권 선진국에서 있던 일. 한 장애인이 ‘내가 섹스할 권리를 누리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송을 걸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법원이 장애인의 손을 들어준 것. 법원 판결에 따라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었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기로 하자. 민망하니까.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장애인 인권 문제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
 
 
이러한 시선은 괜찮은가
 
오토 딕스 「상이군인들」
 
잔인한 그림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뜻함이 없다. 구경거리로 내보이는 것 같다. 심지어 기분 나쁜 구경거리로 말이다.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그림이다.
 
장애인 차별처럼 보이기도 한다. 풍자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풍자한 그림 같아 화가 난다. 그러나 이 그림이 탄생한 맥락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해보자.
 
20세기 독일화가 오토 딕스가 그린 「상이군인들」이란 작품이다. (가난한 시인 「이바르 폰 뤼켄」을 그린 바로 그 화가다.) 딕스는 1차대전의 참전용사. 딕스가 겪은 전쟁은 지옥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전쟁의 끔찍함을 잊고 다시 전쟁을 벌이자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딕스는 견딜 수 없었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을 그렸다.
 
「상이군인들」 역시 전쟁 반대를 외치는 그림이다. ‘보라,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얼굴이 부서졌다. 이러한 고통을 또 겪고 싶은가? 전쟁에 반대한다.’ 딕스의 메시지다. 실제보다 더욱 기괴하고 고통스럽게 묘사한 것은, 신즉물주의 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더 큰 고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셈.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독일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Ernst Friedrich)는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사진집에 안면기형장애를 입은 참전용사들의 얼굴 사진을 집어넣었다. 프랑스 감독 아벨 강스(Abel Gance)의 「나는 고발한다」에는 상이군인들의 으깨진 신체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타인의 상처와 장애를 사람들에게 보여줬지만,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한편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딕스는 훗날 히틀러 패거리한테 곤욕을 치른다. 나치 전쟁광들의 손에 「상이군인들」의 원작은 사라지고 흑백사진만 남았다. 작품 자체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작품의 맥락을 알고 나도 마음 한구석은 불편하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인간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삼아도 되는가? 논쟁을 부르는 주제다. 두고두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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