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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갖고 싶다

김승일
2017년 03월 28일

문단-(화자)-문학

 
 

메타 비평의 화자

 
근 1년 동안 청탁받았던 글을 떠올려본다. 죄다 문단에 대해서 비평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세대론에 대해서 썼고, 독립 출판에 대해, 문단 권위 타파에 대해 썼다. 문단 성폭력에 대한 글도 썼다. 여러차례 대담도 했고 동시에 이런저런 비평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 이 원고도 마감이 사흘이나 지났다. 무슨 말을 하든 똑같은 얘기 같고 지겹다. 다른 사람들 글도 마찬가지다. 문단 비평이 메타 비평이기 때문이다. 메타 비평은 내가 가장 즐겨 쓰고, 찾아서 읽어보는 비평이면서, 동시에 가장 싫어하는 비평이다.
 
이은지의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를 읽었다. 읽고 있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다 읽고 나면 그래서 뭘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다. 이은지는 문단의 자폐성에 대해서 꼬집었다. 문단이 자기가 세운 울타리 밖의 타자들을 환대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는 울타리들이 많을 것이고, 울타리를 세우지 않고는 아무것도 굴러가지 않는다. 마치 상상계가 없는 라깡 정신분석학이 성립되지 않듯이. 그러니까 이은지는 결국 울타리들과 울타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서로를 교육하고, 반성하게 하고, 굽히지 않고 주장할 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쓴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이은지는 어디에 있는가? 이은지가 실제로 어디서 무얼 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의 화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울타리들 구경을 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의 화자가 어느 울타리에 속해 있는지를 모르겠다. 같은 연재란에 소영현이 쓴 「민주화 시대의 비평」에 괄목할 만한 고백이 등장한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문학 풍경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지금껏 무용한 것에 불과한 상념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당분간도 오래 고민했다는 것 말고는 (…)”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대안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라고 뭐가 다른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의 화자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결국 내가 하는 짓도 비평가들을 ‘메타 비평하는 사람들’이라는 울타리 안에다가 모셔두고, 지겹다, 지루하다 성토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비평가는 일전에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썼다. 그런데 나는 문학을 재미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메타 비평은 재밌다. 메타 비평에 대한 비판도 메타 비평이다. 우리는 메타 비평을 하면서 자기가 개입하지 않는 신인 것처럼 굴지만, 결국 그 신은 사이비 신에 불과하다. 왜냐면 그 신은 결국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가 얼마나 사이비 신인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내가 문학을 재미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 구경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오늘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권력을 가지고 싶다.
 
 

시인 화자

 
시인은 어떻게 권력을 가질 수 있을까? 파급력 있고, 경제생활하는 데 보탬이 되는 지면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면 된다. 청탁 시스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쓸 수 있을 때 쓰고, 그것을 게시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자기가 책임질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시공간이 시인에게는 권력이다. 그러나 문단은 시인에게 물리적인 시공간을 파격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이미 예전 글에서도 여러차례 밝혔지만, 특정 담론에다가 시인 이름을 기입하면서 시인에게 권력을 줬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들이 존재한다. 어떤 유명 비평가는 김승일 시인이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자기는 김승일에 대해서 쓰지 않겠다고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친구가 나한테 다 알려줬다. 당신은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큰 출판사에서 편집위원이고, 시집선에 들어갈 시인들 선정도 한다. 당신은 물리적인 시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첫 시집을 10쇄에 걸쳐 판매한 유명한 시인인데도 물리적인 시공간은커녕 이렇게 1년 동안 문단 비판해달라는 비평만 쓰고 있다. 나는 편집위원들이 기획한 기획의 부속품이다. 꼭 내가 투견이 된 것 같다. 싸우라고 해서 싸우다가 하늘을 쳐다보면 비평가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있으면 내가 뭘 해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출판사를 차렸다. 자본금이 없어서 망했다. 자본금하고 계획을 보강해서 다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은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지 생각해봤다. 나는 이제 떼를 쓰기로 했다. 나한테 시공간을 줘라. 왜 안주냐 진짜. 메타 비평을 쓰거나 읽다보면, 내 울타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꽁꽁 숨기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메타 비평을 쓰는 이유가 내 울타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문단이 좋아졌으면 좋겠고 세상도 좋아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러려면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나는 시인이다. 시인은 노동자다. 내 노동의 가치를 정당하게 보상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닌가?
 
첫 시집을 내고 나서 SF에 관심이 생겼다. 2011년에 처음 미래 얘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에 반골 정신이 엄청났다. 괜히 짜증도 많이 났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너무 싫었다. 어떻게 하면 내 시를 비평할 수 없게 만들지 많이 고민했다. 내가 미래로 가면 되겠다. 그러면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딱히 비평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금 여기’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시가 오래 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당장은 해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형식을 사용하거나 비문 생산으로 미학적 성취를 이뤄내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미래가 왔을 때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얘기를 쓰고 싶었다. 역으로, 내 시를 읽기 위해 독자가 미래로 자신을 전송할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에 내가 상상한 미래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대한 시를 쓰지 않기로 했는데 계속 그런 시만 썼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최근엔 꽤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체험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인간에 대해 쓰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한계로 가득 차 있는지를 강조했다면, 그래서 미래의 인간이나 인공지능 기계들에게 인간의 한계성을 투사했다면, 최근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했다. 불가해를 위한 불가해가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미래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였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복잡한 이 세상을 이용해서 잘 살아보자. 메타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자. 이런 얘기를 시에서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 세상에 예술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었으면 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하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것을 존재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행복하니까. 그런 시를 쓰고 있으면 내가 내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를 쓰고 있으면 언젠가 내가 시공간을 창출하거나, 돈 많고 생각있는 출판사에서 시공간을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문인들과 자주 만나거나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 시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문인들 만나면 승일이 너 시가 정말 좋더라 칭찬이라는 칭찬은 그렇게 많이 하면서, 결국 국가에서 하는 사업이나 지원금은 내가 자기들한테 시집 안 보냈다고 절대로 주지 않았다. 연희창작촌에서 만났던 작가회의 소속 시인은 내게 실제로 만나보니 싸가지도 있으시고 점잖고 착하시다고 했다. 누가 제 욕을 그렇게 하고 다니나요? 다들요. 그게 누군데요. 내가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게 문단이다. 무슨 일진놀이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하소연 하면 기분은 좀 좋지만 실제로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이거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피식 웃거나, 아이고 불쌍해라 그게 다 네 업보다. 이러고 말 테니까. 그렇다고 시만 열심히 쓴다고 발언권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내가 내 발언권을 생산하기 위해서 뭘 해야 하나 싶었다. 올초에는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계획했다. 내 작업을 꾸준히 게시하는 것 말고 당장은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게시하면서 시를 쓰고, 내가 연출한 연극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내 시를 출력해서 거리나 특정 공간을 점거한 뒤에 360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올리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기로 했다. 계속하기로 했다. 계속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문단 화자?

 
문단은 화자가 될 수 없다. 문단은 화자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문단의 외부에만 살아 숨 쉬는 화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단의 내부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출판 노동자들이 있고, 작가들이 있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얘기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코멘터리도 있고, 영화잡지에서는 영화인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하지만 시집에는 해설만 실린다. 나는 해설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시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문단은 화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문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잠시 자기가 문단이 된 것처럼 군다. 국가에 대한 글을 쓰면서 국가가 된 것처럼 군다. 메타 비평을 쓰면서 얻게 되는 도취는 우리가 거대한 무언가가 되었다는 착각에서 온다. 혹은 그 거대한 무언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에서 온다. 유행을 쫓거나, 경향을 분석하기 위해 메타를 사용하는 일은 이제 피곤하다.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메타를 고민했으면 좋겠다. 한번만 더 강조하겠다. 문단에 대한 메타 비평은 문단의 권위를 전복시키거나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 싸움 구경은 싸움 구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싸움을 부추기는 행위도 협잡에 불과하다. 구경꾼의 권력을 배분하는 것. 비평가의 권위를 축소하는 것. 모두가 비평가인 시대가 모두가 구경꾼인 시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출판사나 비평가 들이 놀고 있는 시공간을 자신들이 신뢰하는 작가들에게 온전히 맡기는 것. 지면과 콘텐츠를 책임지게 하는 것. 다양성을 추구한다면서 자기 친구들이나 성폭력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김승일 시인에게 꾸준히 일을 주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성실한 노동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여러분 자신의 권력을 위해.


 



김승일
시인. 시집 『에듀케이션』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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